[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인천투데이] 20세기 맥주 전반을 규정하자면 대기업 위주의 상업 양조장이 만든 라거 맥주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금주법으로 인해 개성 있는 소규모 양조장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유럽에서도 라거 맥주의 득세로 인해 다른 종류의 맥주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 됐다. 물론 영국에서 에일 맥주의 전통이 살아남기는 했고, 벨기에는 수도원 맥주를 중심으로 특유의 개성을 지켜내기는 했다. 독일에서도 밀맥주의 전통이 지켜졌다. 하지만 필스너 라거 맥주가 맥주시장을 점령했고 다른 종류의 맥주는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였다.

20세기 후반부에 접어들어 라거 맥주 일색이던 맥주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한 변화는 처음엔 미미했으나 21세기 접어들며 맥주시장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크래프트 맥주 시대가 온 것이다.

크래프트 맥주를 딱 꼬집어 정의하기란 쉽지 않고 기준도 불분명하다. 대체적으로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맥주를 지칭한다고 보는데, 이것 또한 정확하지 않다. ‘작고 독립적이고 전통적인(small, independent, traditional)’이라는 정의도 있지만, 이 또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기존 대형 맥주회사에서 생산하는 전형적인 맥주에서 벗어나 소규모 양조장의 개성 있는 맥주 정도로 이해하면 큰 무리는 없다.

크래프트 맥주의 인기는 천편일률적인 상업맥주가 시장을 점령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측면이 크다. 20세기 내내 대규모 양조회사들이 점령한 맥주시장에서 엇비슷한 맛의 라거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성 없이 엇비슷한 라거 맥주 맛에 식상한 맥주 애호가들이 소규모 양조장에서 개성 강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크래프트 비어가 맥주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고 이해하면 된다. 이 트렌드를 주도한 것은 미국이다.

사진출처 pixabay

맥주는 역사적으로 원래 각 가정에서 담가 마시던, 문자 그대로 수제맥주였다. 그러나 맥주가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극소수 대형 맥주회사에 의해 시장이 평정되고 그 결과 엇비슷한 맛의 라거 맥주가 대세를 이뤘다. 미국에서도 원래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만들었지만, 독일계 이민자들이 본국에서 만들던 라거 맥주를 가져왔고 독일인 특유의 근면함으로 미국 맥주시장을 평정한다. 대표적인 맥주가 독일계 이민자 아돌프스 부시(Adolphus Busch)가 설립한 안호이저-부시의 버드와이저와 프레데릭 밀러(Frederick Miller)의 밀러다.

라거 맥주가 대세를 이루던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소규모 양조장들은 거의 몰락하고 말았다. 자본력이 있던 대규모 양조회사들은 사업 다각화로 금주법이 시행된 암울한 시기를 이겨냈지만, 작은 양조장들은 속절없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고난의 시기를 살아남은 소규모 양조장들도 대형 양조장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중 하나가 앵커브루잉(Anchor Brewing) 양조장이었다.

앵커브루잉은 1896년에 설립된 ‘스팀 맥주’ 양조장이었는데,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60년대에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스팀 맥주란 캘리포니아 지역 양조장에서 맥주를 양조하는 방식을 통칭하는데, 양조장의 천장을 열고 태평양의 시원한 바람으로 맥주 즙을 식히는 과정에서 마치 스팀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됐다. 20세기 초 양조장 수천 개가 성업했으나, 금주법 시대를 거치며 1960년대 미국에는 고작 70여개만 살아남았다. 현재 한국의 맥주 양조장이 100여개가 넘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미국 양조장들의 경영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위기 몇 번을 넘기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앵커브루잉은 문을 닫았다가 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이때 20대 청년이 불쑥 앵커브루잉을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1965년에 프레더릭 루이스 ‘프리츠’ 메이텍 3세(Frederick Louis ‘Fritz’ Maytac III(1937년 12월 9일생)가 앵커브루잉 양조장의 지분 51%를 고작 수천달러를 주고 인수했다. 평소 앵커브루잉 스팀 맥주를 좋아한 프리츠는 이 양조장이 문을 닫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인수를 결정했다.

프리츠는 미국 유수의 재벌회사 메이텍 가문의 아들이었다. 재벌 아들이 인수한 앵커브루잉 스팀 맥주 양조장은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효시, 곧 전 세계 크래프트 맥주 트렌드의 효시가 됐다. 프리츠가 인수한 앵커브루잉에서는 미국 맥주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대기업의 천편일률적인 라거가 아닌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개발했다.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고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으나 앵커브루잉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앵커브루잉을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인기를 얻게 됐지만 프리츠는 사업을 확장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적정 규모를 유지해야한다는 신념을 지켰고,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규모를 늘리기보다는 경쟁자들에게 양조법을 전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 크래프트 비어 초창기에 소규모 양조장이 계속 늘어날 수 있게 기여했으니, 진정한 의미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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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 중에 켄 그로스먼(Ken Grossman)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스포츠와 아웃도어 생활을 좋아한 그로스먼은 캘리포니아에서 자전거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맥주 양조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전거포를 평생 할 생각은 없었던 그는 언젠가 직접 양조장을 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앵커브루잉 견학 후 마음을 굳힌 그로스먼은 2년여 동안 준비해 친구 폴 카무시(Paul Camusi)와 함께 1979년에 시에라네바다 브루잉 컴퍼니(Sierra Nevada Brewing Company)를 설립한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빌린 자본금 5만 달러로 임차한 창고에서 그로스먼과 카무시는 양조를 시작했다. 양조 장비는 인근 농장을 돌아다니며 버리는 낙농설비와 폐품을 모아 만들었다. 독일 양조장으로부터는 중고 당화조를 구입했다. 크래프트 비어 정신에 충실하고 소박하게 시작한 셈이다. 1980년 11월에 시에라네바다는 당시로는 미국에 생소했던 페일 에일 맥주를 처음으로 출시했고, 첫해에 950배럴을 양조했다. 이듬해에는 매출을 두 배로 올렸다.

시에라네바다는 크래프트 맥주에서 가장 중요한 회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시에라네바다의 페일 에일 맥주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크래프트 맥주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라네바다의 페일 에일은 곧 크래프트 맥주 붐을 일으킨 효시라고 할 수 있다. 2013년에 시에라네바다의 맥주 생산량이 1억 배럴을 넘었고, 종업원 숫자도 현재 1000명이 넘는 대기업이 됐다. 시에라네바다는 현재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큰 양조회사이다. 생산량으로 보면 대형 양조회사를 넘어섰기에 더 이상 크래프트 맥주라고 분류하기가 애매할 정도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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