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거 맥주의 득세
라거 맥주의 득세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09.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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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15)

[인천투데이] 영국에서 페일 에일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독일에서는 훗날 세계 맥주 판도를 뒤흔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독일 뮌헨의 슈파텐(Spaten) 양조장 주인 아들인 가브리엘 제들마이어(Gabriel Sedlmyr) 2세와 빈의 드레어 양조장 후계자인 안톤 드레어(Anton Dreher)는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영국을 방문해 선진 양조기술을 배웠다. 친구 사이인 이들은 이 기간에 영국 각지 양조장을 찾아다니며 선진 기술을 배워 돌아왔다. 밝은 색의 맥아를 만드는 기술, 발효 온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냉각코일 기술, 온도계ㆍ당도계 등 당시 앞선 기술로 양조하던 영국 양조장에서 선진 기술을 습득한 이들은 독일 특유의 저온 발효 기술을 접목해 양조의 과학화를 꾀했다.

제들마이어는 영국 방문 시 독일에서 가져간 ‘하면(저온) 발효’ 효모를 영국 양조장에 건네줬는데, 영국에서는 이 효모를 죽이고 말았다. 이때 만일 영국 양조장에서 ‘하면 발효’ 효모를 잘 살려 라거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면, 세계 맥주 역사는 크게 바뀔 뻔했다. 작은 일 하나가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다.

영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제들마이어는 독일 맥주의 특징인 저온 발효 방식의 라거 맥주에 영국 기술을 접목해 맛과 질이 균일한 라거 맥주를 만들었다. 제들마이어의 양조법은 곧 인근으로 퍼져나가 인기를 얻었다.

영국 기술을 접목해 효율성을 높이고 균일한 맥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지만, 몰트는 영국식 페일 몰트가 아닌 기존 독일 방식 몰트를 사용했기에 제들마이어의 맥주는 색이 진했다.

제들마이어가 색이 진한 라거 맥주를 양조했던 것에 비해, 빈으로 돌아온 드레어는 영국 페일 몰트 기술을 적극 활용해 색이 옅은 ‘비엔나 라거’를 개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밝은 색 라거 맥주의 원형에 가까운 맥주가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시는 라거에 비해서는 여전히 짙은 색이었다. 밝은 황금색이라기보다는 짙은 구릿빛에 가까웠다. 비엔나 라거는 여러 라거 스타일 중 하나로 분류된다.

사진출처 Pixbay
사진출처 Pixabay.

체코 플젠의 ‘필스너’

현재 우리가 마시고 있는 라거 맥주의 원조는 체코 플젠에서 만든 필스너(Pilsner) 맥주다.

당시 플젠의 양조장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노력하던 중 바이에른의 젊은 양조사를 초빙해 새로운 시도를 한다. 독일 바이에른 출신 양조사인 요셉 그롤(Josef Groll)이 보헤미아 작은 도시 플젠의 양조사로 임명돼 부임한 것은 1842년이다. 지금은 체코이지만 당시에 플젠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했다. 그롤은 바이에른의 저온 발효 기법과 영국에서 건너온 밝은 색 맥아를 볶는 기술을 사용해 밝은 황금빛 라거 맥주를 만들어냈다. 바로 전 세계를 제패한 필스너 라거의 탄생이다.

플젠 지역 물은 연수로, 이 물로 양조하면 맥아 색이 덜 우러나오기에 밝은 색 맥주가 만들어졌다. 넓은 지하 저장고를 갖춘 플젠의 양조장은 맥주를 숙성시키는 데 적합했고, 특히 유명한 사츠(Saaz) 홉이 생산되는 지역과 바로 이웃하고 있어 뛰어난 품질의 홉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든 라거 맥주는 곧 세계를 점령했고, 지금 우리가 마시는 맥주의 70% 이상을 라거가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짙은 색 라거를 고집하던 뮌헨의 슈파텐 양조장도 1894년에 밝은 색 맥주 헬레스(Helles) 라거를 만들었다.

플젠의 대표적 맥주 상표가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이다. 필스너 우르켈은 오리지널 필스너라는 뜻인데, 라거 맥주의 종가라는 자부심이 상표에 배어있다. 당시 플젠 지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였기에 독일어 명칭이 지금도 사용되는데, 체코어로 필스너 우르켈은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다.

효모 존재 밝힌 파스퇴르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면서 현재 우리가 마시는 라거와 에일 맥주의 스타일이 확정됐고, 맥주 양조기술을 과학화하면서 품질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효모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양조업자들은 양조를 마친 잔여물에서 효모를 걷어내 다시 사용했고, 경험적으로 맥주를 발효시키는 신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존재가 발효를 일으키는지 알지 못했고 환경과 기술 제약으로 맥주 질은 일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처음으로 효모의 존재를 밝혀냈고, 1876년 ‘맥주 연구’라는 저서로 맥주 양조에 과학적 접근법을 제시했다. 또한 파스퇴르는 저온 살균법을 개발해 맥주가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만들었고, 이는 맥주 양조와 유통과정에 혁신을 가져온다.

옛날 각 가정에서 주부가 식구들을 위해 양조해 가족끼리 마시던, 그야말로 수제 맥주는 차츰 소규모 가족 기업으로 발전했고, 산업혁명을 거치고 파스퇴르의 연구에 힘입어 맥주 산업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맥주 양조는 다국적 기업 몇 개가 장악하게 됐다.

라거, 세계 맥주시장 70% 이상

맥주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은 국가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고, 세계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생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맥아 비중이 10% 이상이면 맥주로 분류한다. 반면 독일은 최근까지도 ‘맥주 순수령’에 규정돼있듯이 맥아를 100% 사용해야 맥주로 인정했다. 맥주에 들어가는 재료를 엄격하게 규제한 독일과 달리 벨기에는 수도원 맥주를 중심으로 과일이나 꽃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맥주 수천종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나라 맥주가 맛이 없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세법’상에서 맥아의 비율을 지나치게 낮게 규정한 것이다. 맥아 비중이 10%만 되면 맥주로 인정받기 때문에 맥아보다 가격이 저렴한 옥수수 등 다른 재료를 많이 사용해 맥주를 만들었기에, 몰트 함량이 높은 유럽 맥주에 비해 풍미가 떨어진다. 따라서 몰트 비율이 낮은 한국 맥주는 외국에 수출할 때 맥주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해외 맥주 코너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맥주가 산업으로 발전하고 대규모 양조장이 대량 생산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다국적 대기업으로 발전하면서 맥주 스타일도 변했다. 선사시대부터 중세시대까지 맥주는 전통적으로 ‘상면 발효’ 맥주인 에일 맥주였다. 그러나 저온 발효하는 ‘하면 발효’로 유통이 비교적 용이하고 맛이 깔끔한 라거 맥주가 대량 생산하는 상업맥주로 더 적합하기에 맥주 시장을 점령했다. 전 세계 맥주 시장의 70% 이상이 라거 맥주다.

최근 각광받는 크래프트 비어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라거 맥주가 맥주 시장에서 절대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크래프트 비어, 즉 수제 맥주 붐이 일어나면서 에일 맥주가 다시 각광받고 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했고 21세기 들어서 세계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은 크래프트 비어 시장을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크래프트 비어가 미국에서 발달했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곳도 미국이다. 현재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만드는 마이크로브루어리(소형 양조장)도 미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으며, 마이크로브루어리는 강한 개성과 실험정신으로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미국에서 맥주를 양조하는 데 부가물로 옥수수를 넣기 시작했는데, 미국에 풍부한 재료인 옥수수를 활용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상업맥주 양조장에서 저렴한 재료인 옥수수를 이용해 원가를 절감하려는 목적도 큰 이유였다. 따라서 보리 몰트보다 상대적으로 재배하기 쉬운 옥수수가 보편적인 미국에서 맥주 원료로 옥수수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 결과 미국 맥주는 한국 맥주와 비슷하게 그다지 특징 없는, 밋밋한 맛을 가진 맥주가 됐다. 미국의 대표적 상업맥주인 버드와이저나 밀러의 맛은 뛰어나지 않다. 그런 미국이 크래프트 비어 현상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한편, 부가물(adjunct)을 넣은 맥주를 따로 부가물 맥주(adjunct beer)로 분류하기도 한다. 부가물로 옥수수를 사용한 미국 맥주 맛, 바로 가볍고 시원한 맛에 길들여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