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진

[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날이 선선해졌다. 하늘이 파래진 만큼이나 저녁놀도 부쩍 붉어진 것 같다. 이맘때면 내 마음이 달려가는 곳이 있다. 소래포구다. 그곳에 처음 갔던 날, 생전 처음 엄청난 공포감에 벌벌 떨었다. 두 번 다시 느낀 적이 없을 만큼 강렬한 느낌이었다.

1990년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시골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여기저기 놀러 다니길 좋아한 아빠는 어느 주말 오후, 친척에게 봉고차를 빌려 우리 식구를 모두 태웠다. 우리가 갈 곳이 인천에서 아주 유명한 곳인데, 신기한 철길이 있다며. 나는 그때까지 기차는 딱 한 번 타본 터였다. 신기한 철길이라니, 마음이 마냥 들뜨고 설렜다.

차가 도착한 곳은 소래포구. 분명 어시장이 있었을 테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을터. 하지만 떠오르는 게 거의 없다. 옛일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는 데에 비해 이날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빈약하다. 짐작하건대 그 ‘신기한 철길’의 기억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기억을 지워버린 듯하다.

그날의 기억은 곧바로 철길 위에서 시작한다. 공중에 놓인 좁은 철길엔 붙잡을 난간도, 발아래 안전망 같은 장치도 없었다. 오로지 레일과 침목만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발을 딛고 선 침목과 다음 침목 사이로 보이는 저 까마득한 아래엔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로지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첫 번째 침목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아빠가 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무릎은 펴지지 않았다. 아빠는 이 침목에서 저 침목으로 나를 거의 떼어내다시피 하며 옮겼고, 나는 아빠에게 착 달라붙은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실눈으로 바라본 철길 위엔 사람이 무척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장화를 신은 아주머니들이 그 많은 관광객 틈을 비집고 좁은 철길을 성큼성큼 걸어 다니는 장면이었다. 꿈인 듯 환상인 듯 그러나 생생하게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끝나지 않을것 같은 기나긴 철교도 결국 끝이 있었다. 땅을 밟으니 살 것 같았다. 철교가 올려다보이는 어딘가에서, 우린 새우튀김을 먹었다. 껍질 채 튀긴 새우는 먹기가 몹시 불편했지만 맛은 좋았다. 기분도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아파트 꼭대기 같던 철길이 그렇게까지 높아보이진 않았다.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선선한 바람에 바다 냄새가 묻어 왔다. 곧 해가 질 것 같았다.

어두워지기 전, 다시 철길을 건넜다. 아까보다는 한결 무서움이 덜했다. 그제야 엉거주춤 철길을 걸어가는 언니와 남동생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나만 무서울 리가 없지. 아깐 철길에 오로지 나만 서 있는 거처럼 겁이 났는데 언니와 남동생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고는 동지를 만난 듯 마음이 든든해졌다. 철길 위에서 어느덧 포구에 저녁놀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 인천은 노을이 참 아름다운 곳이구나.

“소래포구를 가로지르는 수인선 협궤철교 위에는 인도는 물론 난간조차 없는데도 매일 인근 주민 및 관광객 등 5000여 명이 건너다니고 있고 추락사고로 사망자까지 발생,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1990.6.30. 한겨레) 그 무렵 신문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우리 가족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소래포구에 가지 않았다. 해산물을 살 땐 연안부두로 갔다. 하루 세 번 기차가 왕복할 뿐, 사람이 훨씬 많이 오갔던 소래철교는 1994년 마지막 기차를 보낸 뒤 관광용 철교가 됐다. 30여 년이 흐르는 사이 철교는 폐쇄됐다가 안전난간을 설치한 뒤 다시 개방하는 등 여러 변화를 겪었지만, 그래도 여전한 건 포구에 내리는 노을과 바다 냄새다. 이번 주말 소래포구에서 대하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사람들로 붐빌 게 빤하니 난 주중에 다녀올 생각이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새우튀김을 먹으며 노을을 바라볼까 한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