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2)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2)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09.2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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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 격문에 담긴 인천 청년의 꿈
정갑용·김만석·백봉흠

[인천투데이] 1933년 4월 30일 새벽 5시 30분 무렵, 현재 동인천 이마트 부근인 인천부 화정(花町)의 조선정미소 창고와 오쿠다(奧田)정미소 창고 사이에서 “우리가 기념할 5ㆍ1절 메이데이가 왔다. 메이데이는 전 세계 노동자ㆍ농민의 일치단결로 우리를 속박하는 쇠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전 세계 자본가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국제적 시위일이며 투쟁일이다”로 시작하는 격문 100매 한 묶음을 경계 중이던 인천경찰서 형사가 발견했다.

매일신보 1935년 2월 1일 정갑용, 김만석, 백봉흠 판결 기사.
매일신보 1935년 2월 1일 정갑용, 김만석, 백봉흠 판결 기사.

격문 명의가 ‘적색노동조합 기관지’였으므로, 인천경찰서는 일회성 격문 살포가 아니라 비밀조직이 있다고 판단하고 수사에 열을 올려, ‘인천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해 조직적으로 일제에 저항한 일군의 항일투사를 확인했다.

여러 명이 관계된 사건이지만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격문을 뿌린 핵심은 정갑용과 김만식이라는 인천 청년이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와 1933년 6월 21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각도 경찰부장 등에게 보낸 문서에 따라 두 사람의 신상과 행적을 알 수 있다.

정갑용(1933.6.30. 촬영)
정갑용(1933.6.30. 촬영)

정갑용(鄭甲鎔/鄭甲溶)은 본적이 인천부 외리(外里) 137번지로 1911년 10월 29일 태어났는데, 출생지는 충남 당진이라는 기록과 본적지라는 기록이 엇갈린다.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 선린상업학교에 입학, 1931년 졸업했다. 이후 모교의 주선으로 경성부 종로의 운송점 사무원으로 채용됐으나 병 때문에 인천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열 ‘프로문학’에 빠져 결국 사회주의 실천운동에 몰두하게 됐다고 한다.

김만석(金萬石)은 출생년도와 본적지 등에 관한 기록이 엇갈리는데, 1912년 11월 15일 생으로 추정되며 본적지는 인천부 송현리 80번지이고 출생지는 본적지 또는 경성이다. 어린 시절에 부친을 따라 포천군으로 갔다가 수원으로 이사해 1924년 안룡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했고 4학년 수료 후 오산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해 1928년에 졸업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인천에 와서 모리모토상점(森本商店)ㆍ바바정미소(馬場精米所)ㆍ김선규상점(金善奎商店) 등을 옮겨 다니며 미곡상 점원으로 근무했다. 가정 형편은 썩 넉넉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1933년께 결혼한 상태로 부인이 정미소 직공으로 일하며 딸을 양육했다고 한다.

김만석(1934.11.5. 촬영)
김만석(1934.11.5. 촬영)

김만석은 1930년 1월에 인천노동조합 정기총회와 인천 사상단체 간담회를 방청하면서 사회주의에 공감해 인천노동조합에 가입, 관련 출판물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한 자생적 사회주의 활동가였다.

자신에게 노조 가입을 권유한 권평근이 1931년 7월에 산업별노조 사건에 연좌돼 검거되자 자택에서 혼자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하던 중 정갑용을 만난다. 이 만남이 메이데이 격문 살포로 이어진다.

김만석은 1933년 4월 18일 정갑용과 두 번째 만났을 때 메이데이를 맞아 격문을 뿌리자고 제안하고 정갑용으로부터 격문 원고를 받았으며, 등사판 제작과 인쇄방법을 협의한 뒤 돌아와 원고 일부를 고쳤다. 인천에서 등사하면 쉽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4월 22일 저녁 수원군 안룡면 안녕리에 사는 보통학교 동창생 백봉흠을 찾아가 격문 등사를 의뢰했다.

친구의 제안을 선뜻 수락하고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고생을 마다않은 백봉흠의 열성이 어우러져 정갑용과 김만석의 계획은 성사됐다. 백봉흠은 4월 27일과 29일, 두 차례 인천을 찾아 등사한 격문 850여 매를 김만석에게 전했다. 그 사이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큰일을 당하기도 했다. 할머니 별세로 경황이 없는 속에서도 친구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백봉흠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친구에게 가급적 꼭 등사해달라고 부탁하는 김만석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백봉흠(1933.6.30. 촬영)
백봉흠(1933.6.30. 촬영)

백봉흠의 조력 덕에 격문을 마련한 김만석은 앞서 언급했듯이 4월 30일 새벽에 집을 나가 몇몇 곳에 뿌렸다. 조선정미소 쓰레기통과 인천부두 세관 구내 길가도 그 중 하나다. 100매를 하나로 묶어 뿌렸다는 것에서 볼 때 메이데이를 맞아 경찰의 경계가 심했기에 낱장으로 여러 군데 뿌리는 게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일제 경찰은 격문 살포를 조직사건으로 확대해 대대적인 관계자 검거에 나섰고 1차적으로 정갑용과 백봉흠을 비롯해 11명을 체포했다. 그중 5명을 기소, 4명을 기소유예, 2명을 불기소 의견으로 검사에게 넘겼고, 검사는 정갑용과 백봉흠 두 명만 기소하고 나머지 9명은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사건을 과장한 일제경찰의 의도가 보이는 대목이다.

검거 선풍을 예감하고 몸을 감춘 김만석은 1934년 5월 26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영등포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기까지 1년간 도피했다. 1935년 1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정갑용 징역 2년 6월, 김만석 징역 1년 6월, 백봉흠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각각 받았다.

1936년 5월 31일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이후 이들의 행적은 찾기 쉽지 않다. <독립신문> 1947년 12월 기사에는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이끈 ‘삼균주의(三均主義) 청년동맹’ 관계자로 정갑용이 세 차례 등장하는데, 동일 인물인지는 더 확인해봐야 한다. 김만석은 오리무중이다.

정갑용과 김만석은 거의 독학으로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그런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생각해보면 순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꾼 꿈은 격문 내용을 볼 때 노동자ㆍ농민 봉기로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공산사회 건설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가진 ‘치기어린’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꿈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수많은 정갑용ㆍ김만석이 식민지 인천의 거리를 때로는 긴장감 속에, 때로는 울분을 품고, 때로는 좌절감을 안고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