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천영기의 인천달빛기행
9. 미추홀구 수봉공원(하편)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수봉놀이동산 /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2014) / 우강정(1979)
고 김정렬 인천시장 선정기념비(1996) / 미추홀구 구민헌장(2012) / 인천자유회관, 통일관

수봉놀이동산에 있는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

무덕정에서 수봉공원으로 계속 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수봉놀이동산 입구가 보인다. 이곳은 1980~90년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닌 아이들에게 꿈의 놀이동산이었다. 그 당시에는 인천에서 유일하게 놀이기구가 있는 곳이었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했다. 그래서 인천의 많은 학교에서 소풍을 왔고,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다람쥐통ㆍ하늘자전거ㆍ범퍼카ㆍ귀신의 집ㆍ우주비행기ㆍ회전목마ㆍ허니문카ㆍ문어발 등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놀이기구들은 자유공원에서 운영하다 옮겨왔다. 1979년 민간업체 ‘자유낙원’이 시설을 지방자치단체에 기부, 15년을 무상 임대하는 형식으로 운영했다. 그 후에는 1년 단위로 재계약해 지자체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다 2008년에 시설이 너무 낡고 안전사고가 날 위험성이 높아 폐장했다. 현재 이곳에는 물놀이장이 있다. 7월에서 8월 중순까지는 물놀이장을 운영하고 평시에는 미끄럼틀로 사용하고 있다.

놀이시설 오른쪽으로 2014년 12월에 인천시가 세운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가 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무공수훈자들의 공훈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공적비 뒤로 육군, 해군ㆍ해병대, 공군, 경찰, 유격대, 군무원 등 3561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각비가 세 개 서있다.

공적비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 수봉산 정상으로 바로 올라간다. 높이 107.2m인 수봉산(壽鳳山)의 원래 지명은 수봉산(水峯山)이었다. 서해에서 떠돌다가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는 전설이 있어, 수봉산(水峯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용현동ㆍ주안동 일대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들어와 마치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처럼 보여 수봉산(水峯山)이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의 정기(精氣)가 좋아 아들이 많이 태어난 영산(靈山)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유로 수봉산(壽鳳山)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혹시 뛰어난 자식이 태어나 장수하기를 비는 마음이 한자를 바꾼 것은 아닐까.

현충탑, 김정렬 선정기념비와 구민헌장비

인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수봉공원 정상에 높이 20여 m의 현충탑이 우뚝 솟아있다. 1953년에 전쟁이 끝나자 재향군인회 인천지부는 한국전쟁과 공비 토벌작전 중 전사한 전몰용사 504명을 추모하기 위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충혼탑을 세웠다. 그리고 1968년 도화동에 있던 인천 출신 국군용사 379위를 서울국립묘지(현 국립 서울 현충원)로 이전할 때 왜소한 규모의 충혼탑을 다시 세워야한다는 여론을 반영, 1972년 광복절을 맞아 이름을 현충탑으로 바꿔 수봉공원 정상에 건립했다. 인천시는 매해 6월 6일 현충일 추모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한다.

현충탑 영역을 벗어나 내려오면 바로 탄성포장이 된 운동공간이 있어 매일 아침ㆍ저녁으로 생활체육교실이 열려 에어로빅을 한다. 그 오른쪽으로 고(故) 김정렬 인천시장의 ‘선정기념비’가 서있다. 1996년 인천시 의정회와 지방행정동우회 인천시지회 등이 공동 발의해 건립했다. 그는 1958년 첫 직선제 시장 선거에서 무투표로 당선됐다. 지방자치제의 근간인 직선제를 말살한 것이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 제4호다. 이로부터 1995년 광역ㆍ기초단체장을 선거로 뽑는 지방자치제가 실현되기까지 35년간 중앙집권적 군사문화 잔재의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선정비 옆에는 2012년 구민의 날인 5월 1일 개정ㆍ선포한 미추홀구 ‘구민헌장비’가 있다. 구민헌장 개정 추진단에 필자도 위원으로 참석했다. 이곳에 와서 구민헌장비를 볼 때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 때의 회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래서 가만히 읽어본다. “우리 고장 미추홀구는 문학산 정기가 서려있는 인천의 태동지이며,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다. 대대손손 살기 좋은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의지와 약속을 이 헌장에 담아 실천하고자 한다. 1.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여 창조적 문화도시를 가꾼다. 1. 늘 배우고 생각하는 지혜로운 구민이 된다. 1.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친환경 도시를 만든다. 1.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정의로운 복지공동체를 이룬다. 1. 창의적 사고와 진취적 자세로 즐겁게 일하는 구민상을 구현한다.”

현충탑(1972) / 의자전망대(2012) / 인천지구 전적비(1980)

의자전망대, 우강정, 자연학습원, 인천자유회관ㆍ통일관

운동공간에서 조금 내려와 왼쪽으로 2012년에 만들어진 ‘의자전망대’가 있다. 예전에는 비둘기집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왼쪽으로 만월산부터 오른쪽으로 문학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나무들이 높게 자라 한 눈에 전경이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조금 더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팔각정이 보인다. 1979년 팔각정 건립에 큰돈을 기탁한 영제한의원 1대 원장인 우강 노학영의 호를 따서 ‘우강정(佑江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팔각정이 지어질 때만 해도 서해가 한 눈에 들어와 풍광과 낙조가 멋지기로 유명했는데 주변이 나무들로 둘러싸여 이제는 정자의 기능을 잃었다.

계속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건물이 보이는데 사람들은 ‘인천자유총연맹 건물’이라 불렀다. 지금은 ‘인천자유회관’과 ‘인천통일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예전에 고등학생들은 의무적으로 하루 종일 통일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이곳과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나뉘어 갔다. 통일교육이 아닌 냉전교육을 받는다는 비판에 지금은 시행하지 않고 있다.

자유회관 맞은편으로 약 3000평의 ‘자연학습원’이 있다. 한 바퀴를 돌아 처음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산책로 형태로 돼있는데, 이곳에서는 일 년 내내 야생화와 원예 수목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에 오면 유치원생들이 체험학습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

이 비는 자유회관 조금 아래 왼쪽에 있다. 한국전쟁이 일본에 알려지자 재일동포 자녀와 유학생들이 의용군을 조직해 극동지구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전선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건의문을 제출한다. 그 결과 동경 오사카 지역 의용군은 미군 제1기병사단, 규슈와 기타 의용군은 미 제3사단에 배치돼 군사훈련을 받았다. 1950년 9월 15일 제1진 280명이 유엔군과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24일 제2진, 27일 제3진이 인천에 추가 상륙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총 641명이 참전해 일본 귀환 268명, 잔류 226명, 전사 60명, 실종 87명 등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에 1982년에 재일학도들의 장한 뜻을 기리기 위해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를 건립했다. 지금도 간혹 참전자들과 후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인천지구 전적비와 유엔 참전 기념탑, 6ㆍ25 참전 유공자 명비

계속 내려가 수봉교를 건너면 ‘인천지구 전적비’의 뒷모습이 보인다. 인천상륙작전 30주년을 기념해 1980년 9월 15일에 세웠다. 1950년 9월 15일 국군 해병대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함으로써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이에 상륙작전에서 산화한 유엔군과 국군 장병들을 추모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전적비를 건립했다. 전적비 앞 동상은 유엔군으로 묘사했다. 삼면에 장갑차와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모습의 부조가 붙어있다.

전적비 왼쪽으로 한국전쟁 67주년을 맞아 2017년에 ‘유엔 참전 기념탑’을 자그맣게 세웠다. 유엔 참전국에 감사하고 호국영웅들이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낸 것을 교훈삼아 나라사랑 정신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세운 기념탑이다. 전적비 뒤에 ‘인천시 6ㆍ25 참전 유공자 명비’가 같은 해에 세워졌다. 명비에는 인천시 거주 참전 유공자 1만 9334명의 이름이 각인돼있다.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1982) / 망배단(1988) / 유엔 참전 기념탑(2017) / 인천시 6.25 참전 유공자 명비(2017)

실향의 애환이 담긴 망배단(望拜壇)

길을 더 내려와 공원이 끝나는 곳 오른쪽에 ‘망배단’이 있다. 인천에는 이북 실향민 7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명절이 되면 임진강가 망배단을 찾아 제를 올렸다. 그러나 연세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져 임진강까지 가기가 힘들어지자 인천에 망배단을 건립하는 걸 논의했다. 마침 노태우 대통령이 인천을 방문하자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했다. 그 결과 대지 60평을 지원받아 1988년 12월 5일에 망배단을 건립했다. 명절과 한식 때면 이곳에 실향민들이 모여 제를 지내고 있다.

수봉공원에 독립운동 기념탑과 명비도

1972년에 현충탑이 세워진 이후 1980년 인천지구 전적비, 1982년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 1988년 망배단, 2014년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 2017년 유엔 참전 기념탑과 인천시 6ㆍ25 참전 유공자 명비가 계속해 들어섰다. 그래서 수봉공원은 인천의 대표적 호국 성지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기념비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관련된 이들만 기리는 것은 안타깝다.

수봉공원이 진정한 호국공원으로 거듭나려면 인천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들을 기리는 기념탑과 명비도 세워야한다. 올해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관한 시민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인천에 3ㆍ1운동 등 독립운동 관련자가 300여 명 된다고 하니, 이들을 기려 인천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시민의식을 한층 높이는게 필요하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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