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윤환 강화도령화문석 대표
화문석 보존ㆍ계승 위해 직장 그만두고 동네 막내아들 역할
“특산품 발전 위해 조례 제정해 특별 관리하고 체계화해야”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인천 강화군에는 명물이 많다. 그 중에서도 여름에 깔고 앉으면 시원하고 겨울에 누우면 따뜻한 화문석은 강화의 자랑이다.

강화하면 ‘화문석’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강화 화문석은 유명하다. 강화에서 재배된 왕골은 재질이 윤택하고 질기면서 탄력이 있고 속이 꽉 차 있기에 강화 왕골 공예품은 다른 지역보다 더 으뜸으로 친다.

강화 화문석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직장도 그만둔 사람이 있다. 박윤환(40) 강화도령화문석 대표다. 그는 강화에서 집안 대대로 이어온 화문석을 되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 7월 브런치카페 ‘도레도레’ 강화본점 일대에서 열린 ‘제1회 강화 플리마켓’에도 참여해 강화 화문석을 선보이고 지역을 알리는 등, 기회가 되면 어디든 달려간다.

강화 화문석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화 송해면에서 화문석 체험관과 생산시설을 운영하는 박 대표를 만났다.

강화도령화문석 박윤환 대표(사진 이보렴 기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오로지 수작업으로 명품대열 올라

화문석(花紋席)은 ‘꽃무늬 자리’라는 말로, 이를 풀이하면 ‘왕골을 건조시켜 꽃모양 등으로 무늬를 넣어 짠 돗자리’를 뜻한다. 무늬가 없는 돗자리도 있지만 이왕이면 무늬가 있는 것이 좋고, 그보다도 꽃밭에 앉은 듯 아름다운 무늬를 넣은 돗자리에 앉는 것이 인간의 미적 감각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화문석이라는 말을 붙였을 게다.

“화문석은 덥고 끈적거리는 바닥에 깔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요긴한 물건이다. 그런데 여름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방바닥에 깔고 앉거나 누우면 보드랍고 몸을 따듯하게 한다.”

화문석이 원재료인 왕골은 갈대나 물가에서 자라는 다른 식물과 다르게 속이 꽉 차있고 탄력이 있다. 겉은 윤기가 나고 부드러우며 질기다. 또, 습기에 강하고 수분을 흡수할 뿐만 아니라 보온성이 있어 박 대표의 말대로 여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겨울에도 사람을 이롭게 한다.

“버릴게 하나도 없는 왕골과 이를 재료로 만든 화문석은 가공부터 제조까지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 한다. 보통 10년 이상 숙련 과정을 거쳐야 우수한 제품이 나오고 현재 40~50년 돗자리를 짜고 있는 명인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자리에 까는 화문석 하나를 짜기 위해서는 숙련된 명인이 해도 10일은 족히 걸린다. 손놀림 수 만 번으로 왕골을 대고 실을 앞뒤로 엮어야 명품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정성을 다해야한다. 한 자리에 오랜 시간 앉아서 손재주를 발휘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수확된 왕골은 건조와 염색 등 가공을 거쳐 화문석의 재료가 된다.(사진 이보렴 기자)

 “강화도령, 도령님 오셨네”
강화의 오랜 역사 ‘화문석’

박 대표는 ‘강화도령’이라는 상호를 사용하고 있다. 강화도령은 조선 철종을 일컫는 말이다.

철종은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고 난 후 이틀 만인 8일 왕위에 올랐다. 그 때 나이 19세였다. 그는 강화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왕에 오를 만큼 학식과 덕망이 있지는 않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정치권 한복판에 들어간 것이다. 철종은 당시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에 휘둘려 기를 못 펴고 있다가 후사 없이 33세에 죽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말인데, 화문석을 팔러 가면 ‘강화도령 오셨네’라고 했다. 즉, 화문석이 강화의 특산물이고, 강화하면 강화도령이라는 말이 흔하게 불렸기 때문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철종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강화에서 자란 강화도령은 친근하고 서민적이고 사람들에게 인식이 잘 돼 상호로 사용했다.”

화문석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올라간다. 무슨 이유로 강화에서 화문석이 제조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으나, 강화에 왕골이 자생하고 이를 돗자리로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강화 화문석이 유명해진 것은 고려 때 왕이 강화로 피신하고 그 일가와 신하들이 강화로 유입되면서부터다. 기록에 의하면, 화문석을 왕가에 상납하고 선물용으로도 제작됐으며, 중국 사신들도 화문석을 감탄하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집안에서 화문석을 하게 된 역사는 잘 모른다. 어머니 집안에서 생산을 이어오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집안이 강화에 터를 잡고 있기 때문에 조선이나 고려시대까지 명맥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화문석 체험학습을 지도하고 있는 박윤환 대표.(사진제공 강화도령화문석)
왕골 재배지(사진 이보렴 기자)

 왕골ㆍ화문석 생산 갈수록 어려워
사양화되고 박물관에서나 볼 수도

박 대표는 왕골도 직접 재배하고 있다. 회사 뒤쪽 산기슭에 습지가 있는데, 재배지를 올라가면 개구리와 맹꽁이 소리로 시끄럽다. 왕골이 친환경적으로 재배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왕골은 1년에 이모작 한다. 주로 8~9월과 10월에 거둬드린다. 또, 농약 등 화학약품이 들어가면 왕골이 죽기 때문에 약을 치지 않고 친환경적으로 키운다. 재배 면적은 1000평 정도 되는데, 재배 방식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람이 일일이 베어서 수확한다. 그러다보니 수확량이 많지 않아 다른 농가에서 재료를 조달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왕골 재배가 힘들고 재정적으로 어렵다. 재배농가는 갈수록 고령화되고 있다. 몇 년 사이에 재배농가가 120가구에서 20가구 정도로 줄었다. 이제는 왕골이 귀해 제품 생산도 쉽지 않다. 화문석이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과정과 사람의 손으로 정성을 들여 만드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 안 할 것이다.”

박 대표는 왕골 재배와 제품 생산 반자동화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생산과 유통 등과 관련해 강화군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나 쉽지 않다고 했다.

“강화의 특산품, 즉 왕골을 이용한 가공품은 정확히 말하면 기타 공예품이 아니라 화문석이다. 화문석을 특산품이라고 칭하면 인천시나 강화군에서 그에 맞는 특별 관리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이 운영하기 때문에 시장 경쟁 논리로 접근하면 앞으로 화문석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산품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조례 제정 등으로 체계화해야

강화도령화문석 박윤환 대표(사진 이보렴 기자)

강화군에는 특산물과 특산품이 많다. 화문석 외에도 인삼ㆍ순무ㆍ새우젓ㆍ속노랑고구마 등이 특산물이다. 그러나 강화군에는 특산물ㆍ품을 지정하고 생산ㆍ가공ㆍ유통 등 관련 산업을 키우고 특화해 발전시킬 수 있는 관련 조례나 규정은 없다. 그저 강화에서 나는 특수한 농산물ㆍ가공품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강화군은 왕골공예산업 활성화를 위해 왕골 재배농가에 건조 연료비를 지원하거나 후진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화문석 등 특산품을 재도약시키기에는 그 지원체계가 미약하다는 지적도 받는다.

박 대표는 사실상 강화군과 싸우고 있다. 왕골 재배와 화문석 생산을 담당하는 강화군 부서가 서로 다르다. 이 산업에 종사하는 주민 처지에서는 팀 단위 행정에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은 돗자리와 관련해 1조 원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0억 원 안팎이다. 이 좋은 왕골 제품이 생산에 어려움이 있어 관련 산업이 무너지면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화문석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기도 하고 국가와 지역의 자산이다. 시장 논리를 갖다 대고 개인의 영업으로만 취급하면 그야말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 것이다.”

박 대표는 동네에서 막내아들 대우를 받는다. 어릴 때부터 봐온 동네 어르신들은 마치 친부모와 같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가 애쓰는 모습을 기특해한다.

박 대표의 부모는 화문석으로 생계를 이어왔고 지금도 생업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도 박 대표가 화문석의 명맥을 잇겠다고 나섰을 때 말렸다.

“처음에 화문석 일을 이어받고 의욕에 넘쳤을 때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어려운 일이니 다니는 직장이나 잘 다니라고 했다. 나는 충분히 비전이 있다고 본다. 현재까지는 과연 화문석을 강화의 특산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바란다.”

강화도령화문석 체험관·카페 (사진 이보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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