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진.

[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내 첫 책이 나왔다. ‘사연이 있는 요리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지면에 실을 때는 원고량이 정해져있어 가지치기한 내용이 많았다. 빠진 이야기를 덧붙이고 문장을 다듬으며 원고를 고쳤다. 같은 글을 수십 번 읽으니 재미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폭풍처럼 원고를 마감한 뒤 책이 인쇄되길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내 마음은 될 대로 되란 식이었다.

책 나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책이 나온 직후의 뒤 숭숭함과 초조함, 지인들의 축하와 격려에 기쁘다가도 판매량에 예민해지던 온갖 감정은 어느새 다 사라지고, 책 내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들뜬 상태가 가라앉으니 몸이 자꾸 쳐졌다. 침대에 눕고 싶고 밥은 먹기 싫고 일하기도 귀찮고. 그래서 빵과 과일만 먹고 책상을 한껏 어질러 놨다.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 걷기인데, 날씨가 더우니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면서 매일비슷한 상태로 며칠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글쓰기 수업 보조강사를 시작하고, 새 책 계약서에 서명을 하며 새로운 일거리를 계속 만들었다.

늦은 밤, 할 일을 잔뜩 쌓아둔 채 무거운 마음으로 맥없이 누워 있을 때였다. 무심코 SNS를 보는데, 지인이 올린 글에 시선이 멈췄다. “한여름에 땀 한바가지 쏟으면서 호박죽은 왜 하냐면 내가 먹고 싶어서.” 글 아래엔 호박죽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

노랗고 걸쭉해 보이는 호박죽 사진을 보자 뱃속에 허기가 돌았다. 2주 전 남편이 어딘가에서 가져온 단호박 한 덩어리를 냉장고에 넣어둔 게 생각났다. 찹쌀가루도 있겠다, 나도 호박죽을 끓여볼까. 이미 열두 시가 다된 시각. 에라 모르겠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단호박이 썩지 않았길 바라며 냉장고 채소칸을 열었다. 단호박은 단단했다. 그래서 단호박인가. 호박을 씻고 힘을 줘 반으로 갈랐다. 껍질을 벗기고 듬성듬성 썰어 냄비에 넣었다. 잘박하게 물을 붓고 가스불을 붙였다. 호박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찹쌀가루 반 컵을 물에 풀어놓았다. 찹쌀가루를 끓는 죽에 바로 넣으면 덩어리질 수 있으니까.

호박은 금세 익었다. 남들은 한밤중일 테니 아무래도 믹서기를 돌리는 건 무리겠지. 설거지거리를 만드는 것도 싫고. 큰 포크를 쥐고 냄비 속 호박을 으깼다. 앗, 뜨거! 펄펄 끓는 김에 손가락을 델 뻔했다. 고무장갑을 끼니 그깟 김 따위 문제없다. 찹쌀가루와 소금을 넣고 잘 저어주었다. 이제 불을 끄고 먹을 일만 남았다.

하얀 그릇에 노란 죽을 가득 담았다. 식탁 한쪽엔 지난주에 읽던 책이 놓여 있었다. 열정적이었지만 끝내 외롭고 쓸쓸했던 화가 고흐의 그림과 생애가 담긴 책, 표지가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한 아름답고 슬펐던 책 ‘빈센트 나의 빈센트’.

호박죽을 먹으며 노란 책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귀퉁이를 접어놓은 곳은 더 유심히 읽었다. “마음이 울적할수록 그의 그림은 더욱 환한 색채로 빛났다. 너무나 쓸쓸하고 우울했기에, 더더욱 따스하고 환한 구원의 이미지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눈물이 툭 떨어졌다.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어쩐지 힘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여름 태양빛 같은 호박죽으로 배를 채우고 마음엔 고흐의 노란 색채를 가득 들여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마음이 환해지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작년 12월부터 쉴 틈 없이 글 쓰고 강의를 했다. 책이 나온 후론 감정을 많이 썼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을 테고 쉬고 싶은 게 당연할 터.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내 앞에 정작 나는 새로운 일거리를 들이밀며 어서 일어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휴가 일정까지 취소하면서.

여전히 마감과 강의는 시곗바늘처럼 정확히 돌아오고 몸 곳곳에 쌓인 피로는 풀릴 새가 없지만, 마음만큼은 아주 조금 느슨해진 것 같다. ‘좀 부족하면 어때?’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잔뜩 긴장한 나를 좀 놓아주는 중이다. 몸에 좋은 채소와 과일도 열심히 먹는다. 당분간 내 영혼의 음식을 노란 호박죽으로 삼기로 했다.

※ 심혜진은 2년 전부터 글쓰기만으로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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