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49>
수사, 왕궁터와 다니엘묘

폐허로 변한 수사 왕궁 터.

[인천투데이] 고대 엘람왕국의 수도인 수사(Susa)를 찾아간다. 수사는 이란 남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다. 수사는 그리스식 표현이고 원래 명칭은 슈쉬(Shush)다. 이 도시는 두 강 사이의 충적평야에 자리 잡은 까닭에, 기원전 4000년께부터 도시를 건설하고 문자와 십진법 등을 사용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다. 요충지에 위치한 까닭에 주변 국가로부터 침입도 잦았다. 기원전 2300년대에는 사르곤 왕에 의해 아카드제국에 병합됐으며, 신수메르 우르 제2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수사가 엘람왕국의 수도로 재탄생한 것은 기원전 2004년이다.

수사는 고대로부터 페르시아제국 시기까지 정치ㆍ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한 까닭에 사르디스ㆍ엑바타나ㆍ페르세폴리스 등 중요한 길이 연결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페르시아의 문명은 이곳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렬한 태양에 천지가 흐물흐물하다. 땡볕이 지상에 빨대를 꽂고 모든 기운을 빼먹는 듯하다. 열기를 피하고 점심도 먹을 겸 식당에 들렀다. 그늘 아래 자리 잡은 식탁들에는 카펫이 깔려 있는데 하나 같이 푹신하다.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카펫과는 다른 감촉이다. 문양도 다르다. 특히, 벽에 걸린 카펫은 무언가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왕궁 터를 지키는 수사성.

카펫은 고대 페르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중서부 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 보온을 목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사막지대나 산이나 들판에서 여름과 겨울을 지내야하는 이들에게 카펫은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 장식과 가재도구를 넣는 주머니, 또는 당나귀나 낙타의 안장 덮개 등으로 그 활용 폭이 넓어졌다.

카펫은 일반적으로 양모로 만들거나 양모에 비단을 섞어서 만든다.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다보면 자국 카펫이 우수하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세계 1위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나라들도 카펫에 관한 한 이란을 최고로 친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1위의 품질이다. 이란의 카펫은 문양과 감촉부터 다르다. 가히 예술품의 경지다. 이란 카펫이 예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8000년을 이어온 페르시아 카펫 제조기술의 통합된 응집력인 바, 이는 곧 수천 년을 면면히 지켜낸 전통의 승리요, 자존심의 산물이다.

카펫이 동서 문명의 교류 품목으로 등장한 것은 파르티아왕국(BC 248~AD 226) 때다. 지금의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한 이 왕조는 지역 특성상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발전했는데, 페르시아의 전통문화와 그리스ㆍ로마의 헬레니즘문화, 그리고 중국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카펫도 이때 널리 알려졌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을 보면, “파르티아에서는 양모나 가죽 혹은 야란사(野蘭絲)를 방적해 사용하고 이것들로 탑등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했는데, 탑등이 곧 오늘날의 카펫이다. 카펫은 동서 문명의 주거생활(住居生活)에 매우 중요한 필수품으로 각광받았다. 생활필수품인 카펫은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했는데, 중국 비단이 전래되면서부터는 보다 가볍고 고급스러운 물품으로 발전하면서 부와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고대 수사의 번영을 말해주는 신상.
수사 왕궁 터에서 발굴된 페르시아 전사.

수사는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됐다. 성터는 비록 기초석만 남았지만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수사왕궁의 화려함도 극에 달했다. 다리우스 대왕의 명문(銘文)을 보면, 당시 화려한 궁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레바논에서는 국보급 삼나무를 가져왔다. 금은 사르디스와 박트리아, 은은 이집트, 상아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왔다. 코라스미아에서는 터키옥을, 엘람에서는 돌기둥을 가져왔다. 궁전 건축에 필요한 각종 기술자들은 각국에서 징발했다. 그야말로 페르세폴리스를 능가하는 화려한 궁전이었을 것이다.

다리우스 대왕은 수사에서 지중해 연안 사르디스에 이르는 총2400km의 왕의 도로를 만들었다. 역전제를 채용해 각 역에 말을 배치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 교역로였고 전시(戰時)에는 수송로였다. 이를 따라 동서 문물이 유통되고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멀리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까지 이르게 됐다.

수사의 중심은 엘람왕궁 터다. 이밖에도 달레이오스 1세 궁전, 신전 터, 기술자들의 주거지 등 텔(언덕) 네 개로 이뤄졌다. 왕궁 터 발굴에서 나온 유물은 왕비 나피르 아수(Napir-Asu) 입상, 바빌로니아에서 가져온 마니슈토스의 오벨리스크, 나람신의 전승비, 함무라비 법전비 등이다. 하나 같이 세계 유물이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다.

다양한 종교의 성인 다니엘의 묘.

궁전 터에서 조금 떨어진 사우르 강가에는 예언자 다니엘의 묘가 있다. 다니엘, 느헤미아, 에스더 등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다니엘은 다양한 종교를 아우르는 성인이다. 그는 이스라엘 왕조 멸망 후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포로가 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난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다니엘 묘는 이슬람의 시아파 교도에게 중요한 참배 장소이기도 하다. 천으로 덮여있는 석관묘는 가묘(假墓)다. 이 묘는 18세기까지 아랍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됐는데, 12세기 셀주크 왕조 시대에 이곳을 여행한 벤야민은 다니엘의 묘를 두고 도시민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니엘의 관을 유리관에 넣어 도시 중앙을 흐르는 강의 다리에 매달아뒀다고 한다. 땅 속에 묻히지 못한 다니엘의 관은 그 후 어떻게 됐기에, 오늘날 가묘만이 덩그렇게 남아 나그네를 맞이할까. 하지만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다니엘이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리라.

다니엘 묘는 참배객들로 온기가 넘친다. 저마다 신심(信心)을 담아 묵념과 기도를 한다. 순간, 적어도 이 작은 성묘에서만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 아니 지구촌 모든 인간이 하나다. 평화, 화해, 사랑이 충만한 곳은 화려한 궁전도, 높다란 신전도 아니다. 작은 가슴 속에 있는 무한한 영토(靈土). 평화와 사랑은 여기서 발원하는 것이리라.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