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태연
<부평신문> 편집위원
더디게 오던 봄날은 왔다. 물리적 날씨가 하루하루 냉기를 품고 봄꽃의 개화를 막아섰지만 자연의 순환을 아주 막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마니산을 오르니 산 전체를 무리 짓거나 띠를 만들기도 하고 가만히 숨어 몇 그루의 모양으로 나서기도 하는 진달래가 참 어여뻤다.

한그루의 나무에서도 꽃이 피고, 새순이 돋는, 교대와 순환의 조화가 산 전체로 번져갔다. 그저 기다리고 있으면 누구도 해하지 않으며, 자기만의 아름다움이 만개하는 눈물겨운 눈부심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산에서 바라보는 먼 바다와 그 사이를 채우는 인간들의 농토 또한 조화롭다. 자연에 기대여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경이롭고, 이상적이다.

정치인들은 자주 산에 오른다. 주로 무리지어 오르며, 눈빛을 빛내곤 한다. 산에 올라 정치적 야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에게 우리 서민과 같은 완상은 너무 한가로운 것일까? 그런 사람들에 관한 서글픈 소식들이 지상을 채우고 있다.

서민들에게 던져준 작은 희망, 그 속에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기원했던 시민들이 기꺼이 채워주었던 커다란 결집과 기대, 그리고 온몸을 던져 지켜내려 했던 한 사나이 ‘바보 노무현’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가족 그리고 측근들의 ‘돈’과 관련된 수상한 ‘사건’이다. 기득권자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정치지도자의 안타까운 몰락에 관한 소식들이다.

차마 믿기 힘든 그들의 속삶에, 한숨을 쉬며 옆으로 얼굴을 돌려보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의 기운을 얻고 자리했던 시민권력의 책임자가 그런 민망한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맥이 풀리는 것이다.

개인의 부침이야 자신들의 몫이다. 그러나 정치인 노무현의 몰락은 또 다른 절망과 연결된다. 그것은 서민들이 희망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 좀 더 현명하게 본다면 ‘바보 노무현’은 사라지지만, 그는 변하기 전의 희망으로 남는다. 변한 노무현으로 인해 세상의 원칙과 순리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다가도 그들의 무책임한 권력이전으로 서민들의 삶이 척박해진 것을 떠올리면 분노가 돋아난다. 대통령직을 물러나면서 “시원하다”고 말하며 툭툭 털고 봉화로 가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가 서민의 남은 고통에 대해 번뇌하지 않는다는 불쾌감이 들었다. 그런데 정치인의 마지막 늪인 부패의 함정에서도 그가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그 정치적 경박성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단지 분노가 길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몫은 그만큼이었을 뿐이다.

어느 날인가 고속버스 창밖으로 바라본 어두운 시골길에서, 단 한 개의 가로등이 깊은 어둠에 아스라한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 빛 아래로 어렴풋이 보이던 작은 길이 떠오른다. 오히려 그 작은 불빛은 세상의 어둠이 얼마나 짙은지를 일깨우는 고통스러운 선지자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고통스러운 어둠속에 갈 길이 있다는 것을 함께 비춰주고 있었다. 한 점 희망처럼 번져나가는 작은 불꽃을 보면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두려움과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은 처연하지만 아름답게 빛난다. 깊은 그리움을 안은 진달래꽃으로 오든, 벚꽃 펄펄 날리는 바람으로 오든, 그 속에 담긴 건 오직 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또한 기다란 전깃줄에 매인 희미한 가로등이든, 저 혼자 발광하는 반딧불이든 그것은 어둠을 이겨내는 희망의 빛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운명에 푸념하지 않아
다만 보고 싶은 것이 있어
단 하루라도 아무 일 없는 날을
짙은 나무 그늘의 어두움이
여름, 한적함, 낮잠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그런 날을

2차 대전 당시 절망과 희망의 교착지에서 살아갔던 러시아병사의 이런 소망이 2009년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의 마음속 소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스럽다. 지금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멀리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불안한 가슴속이지만 오늘의 봄날은 너무 따뜻하고 가슴 아프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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