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8)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8)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07.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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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 문서는 인천이 본가(本家)”

[인천투데이] 1930년 2월 28일 이른 아침, <중외일보> 인천지국과 인천공립보통학교 등 현재의 중구와 동구 일대에 ‘3ㆍ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제목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3ㆍ1운동도 11년을 경과했다. 그러나 지금 도리어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는 그 정도를 더하고 있어 2000만 생령의 고통과 비애는 극에 달해 있다. 보라! 저 놈들의 은행, 회사, 상점과 수리조합 및 농장의 발전․확장을! 그리고 우리 도시, 농촌의 파멸, 실업자와 빈민굴의 증가, 소작농민의 빈곤격화를! 피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자는 조선의 노농 군중이고 영화와 향락을 누리는 자는 일본의 자본가와 지주가 아닌가! 그들은 이러한 착취와 야만적 압박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군과 경찰을 배치하여 감옥을 확장하며 악법과 가혹한 형벌로 우리 전위 투사를 도살하고 해방운동을 말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에 당면한 조선 민중을 위한 운동과 죽음을 무릅쓴 투쟁은 창검과 철창으로 근절할 수 없다.”

비슷한 시간에 누군가가 서울 서대문우편국 우체통에 전국의 청년ㆍ사회단체로 보내는 우편물을 넣어둔 것이 발견됐다. 다음날인 3월 1일 오후 1시경, 서대문경찰서 형사가 현재의 고양시 지축동에서 한 조선인 청년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검문했다. 몸을 수색하자 ‘영등포공진상회’에서 ‘이리청년동맹’ 앞으로 보내는 봉투 등 우편물 7통을 갖고 있었다.

청년은 ‘인천부 외리 27번지에 사는 천일(天日)정미소 직공 김덕룡(金德龍)이라며 모르는 사람이 우편을 보내주면 돈을 준다고 해서 받았을 뿐’이라 했다. 하지만 체포를 피할 수 없었고 수사 과정에서 격문 사건의 전모가 조금씩 밝혀졌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경과를 보도한 1930년 3월 6일자 <조선신문> 기사 제목처럼 불온문서는 인천이 본가였다.

'조선신문(朝鮮新聞)' 1930년 3월 6일 2면.
'조선신문(朝鮮新聞)' 1930년 3월 6일 2면.

배후는 ‘인천청맹’이란 약칭으로 불린 ‘인천청년동맹’이었다. 인천청맹 간부 김점권(金點權), 인천청맹화정반원 이두옥(李斗玉)ㆍ이홍순, 인천청맹원 안문식ㆍ이수봉, 사이토(齊滕)합명회사 인천지점장 유창호 등이 줄줄이 체포됐다.

하지만 이 격문 사건을 가장 먼저 발의해 실행한 인물은 체포되지 않았다. 인천상업학교 출신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이승엽(李承燁)이다. 격문 내용도 이승엽이 불러줬으며, 이두옥이 받아써서 인쇄했다. 여러 명이 관계된 사건이지만, 그중에서도 김점권과 이두옥을 소개하려한다. 서대문서 형사의 검문에 본인을 김덕룡이라 한 그 인물이 바로 김점권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가 4장일 정도로 1930년대를 굽힘없이 항거한 사람이다.

김점권(1930년 2월 28일, 1930년 9월 8일, 1938년 8월 9일)
김점권(1930년 2월 28일, 1930년 9월 8일, 1938년 8월 9일)

인물카드 내용을 종합하면, 김점권은 1907년 10월 30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가 인천부 화정이라는 기록과 현재의 서울시 은평구란 기록이 엇갈린다. 거주지는 공통적으로 인천부 부도정(敷島町)이다. 득용(得用)이란 다른 이름이 있으며, 어머니는 서 씨다. 키는 165cm 안팎이며, 학업과 관련한 기록은 없다.

격문 사건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1931년 4월 29일 출소했고 1933년 12월 27일에는 공산당 재건 사건 관계로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1934년 6월 3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38년 8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됐다가 1941년 3월 13일 출소했으니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 상당 기간을 감옥에서 보낸 셈이다.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계열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상임집행위원(<독립> 1946년 3월 27일)이 됐고 1948년 8월 25일 남한 지역 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서 선출된 대의원이기도 하다.

이로 보아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이후 해방 이후에도 관련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계열에서는 상당한 명망을 쌓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월북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이두옥(1930년 2월 28일, 1930년 9월 15일, 1932년 5월 2일)
이두옥(1930년 2월 28일, 1930년 9월 15일, 1932년 5월 2일)

이두옥은 인물카드가 모두 3장 있는데, 전반적 생애에 대해서는 2018년 3월, 인천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발간한 ‘개교 123주년 인천고 인물사’에 자세히 소개돼있다. 여러 기록과 자료를 종합해보면, 1911년 9월 10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는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 2390번지이며, 주소는 인천부 용강정(龍岡町) 24번지이다. 키는 자료에 따라 다르나 160cm가량이며, 부친 이성주(李性主)와 모친 윤 씨 사이의 4남이다.

이 격문 사건은 이승엽 등 인천청년동맹 관계자들이 광주학생의거 영향으로 일어난 인천상업학교 동맹휴교와 관련해 구류를 처분 받은 이두옥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데서 비롯했다고 하므로 당시 인천 청년계의 주목을 받은 인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3년 8월 15일 호외 2면의 이두옥 자료 사진.
'동아일보' 1933년 8월 15일 호외 2면의 이두옥 자료 사진.

1930년 6월 9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에게 보고한 경기도에서 퇴학ㆍ정학된 학생명단 중 인천공립상업학교 4학년, 20세로 나오며 당시 주소는 인천부 용강정 26번지 이수옥(李水玉) 집이다. 거주한 집의 주인 이름이 이두옥과 같은 돌림자를 쓰는 친형 또는 같은 집안사람으로도 생각되므로 학업을 위해 고향 제주를 떠나 인천에 온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격문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31년 5월 7일 출소했으며,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과 1936년 반제동맹 사건 등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김점권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계열에서 1930년대를 치열하게 항쟁한 인물이다.

[그림2]
[그림2]

해방 이후 이두옥의 행적은 고향 제주에서 확인된다. <경향신문> 1949년 6월 25일자 기사에는 제주 4ㆍ3항쟁 과정에서 국군 포로가 된 소위 ‘제주도구국투쟁위원회’ 관련자를 면담한 내용이 있는데, 이 면담자리에 [그림 2]에서 보는 것처럼 전 남로당 인천 책임자였다가 1948년 8월 중앙에서 파견한 지도원으로 일본 리쯔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출신인 39세 이두옥이 나온다.

39세라는 나이, 남로당 인천 책임자였다는 것, 고향이 제주도라는 것 등, 어느 모로 보나 인천상업학교 출신 이두옥이다. 리쯔메이칸대학 출신이라는 것으로 보아 1930년대 후반에 일본에 유학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면담에서 전향 의사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두옥은 ‘전향할 의사가 없다’고 했으며, ‘인천고 인물사’에 따르면 제주 항쟁 지도부와 함께 총살형을 받아 사망했다.

인천고등학교 전신인 인천상업고교 출신으로 동문회에서라도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는 이두옥과 다르게 김점권은 인천에서 완전히 잊힌 인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두 사람이야 말로 ‘인천 사람’다운 면이 많다고도 할 수 있다. 각자의 꿈과 이유로 고향을 떠나 모여든 이들의 고장, 부두 노동과 공장 직공이 많았던 사회적 환경, 새로운 문물이 일찍부터 드나든 곳에서 사회주의를 접하고 그 실천을 위해 굽힘없이 싸워나간 사람들이 터전이 인천이라면, 김점권과 이두옥이야말로 옳든 그르든 인천에서 배우고 익힌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한 사람이 아닐까?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