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생채소가 내 밥상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다. 더위 때문에 요리가 힘들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은 채소와 과일의 성대한 축제가 벌어지는 계절, 여름이다. 계절이 준 이 소중한 선물을 ‘날 것 그대로’ 즐기고 싶다.

그중에서도 오이는 냉장고에 빼놓지 않고 채워둔다. 상추나 고추 같은 채소는 밥과 같이 먹어야하고 쌈장도 필요한데, 오이는 그렇지 않다. 반찬으로도 좋지만 출출한데 딱히 밥은 먹기 싫고 과일 썰기도 귀찮을 때, 그냥 물에 쓱쓱 씻어서 손에 들고 먹기 딱 좋다. 와작와작 씹는 소리에 스트레스도 달아나는 것 같다. 단, 오이를 맛있게 먹으려면 한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굵은 소금으로 오이 껍질을 닦는 것이다.

오이 껍질에는 쓴맛이 나는 쿠쿠르비타신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다. 오이를 비롯해 수박ㆍ참외ㆍ멜론 등 박과 식물 대부분이 이 성분을 지니고 있다. 쿠쿠르비타신은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독성물질로, 사람도 많이 먹으면 식중독을 앓을 수 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이든 참외든 식용으로 재배되는 작물에는 몸에 해가 될 정도의 독성이 들어 있지않다. 다만 쿠쿠르비타신이 몰려 있는 껍질과 꼭지 부분을 먹기가 좀 힘들 뿐이다.

오이도 마찬가지다. 껍질에서 종종 쓰고 떫은맛이 느껴진다. 햇볕이 강할수록 오이는 이 성분을 많이 만든다고 한다. 날이 가물어 오이에 수분이 부족해지면 쓴맛은 배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영양성분이 많은 껍질을 버리면 너무 아깝다. 방법은 하나, 굵은 소금으로 껍질을 문지르는 것이다. 쿠쿠르비타신은 수용성 물질이어서 물에 쉽게 녹는다. 소금으로 문질러 껍질에 생채기를 내면 삼투압 현상으로 오이에서 물이 빠져나오는데, 이때 쿠쿠르비타신도 물에 녹아 함께 나온다. 쓴맛이 빠진 덕분에 꼭지와 껍질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고 소금 덕분에 살짝 짭짤하게 간이 되어 먹기에도 더 좋다.

그런데 의외로 오이를 못 먹는 사람이 주위에 꽤 있다. 오이만큼 상큼하고 순한 맛의 채소를 싫어하다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건 식성이 아닌 유전자 문제일 수 있다. 미국 유타대학교 유전과학센터는 오이의 쓴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정 유전자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사람의 7번 염색체에 존재하는 TAS2R38에는 쓴맛에 민감한 PAV와 둔감한 AVI 두 종류가 있는데, 민감한 유전자를 지닌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100배에서 1000배가량 더 민감하게 쓴맛을 느낀다고 한다.

오이 특유의 향을 싫어할 수 있다. 알코올 일종인 노다니엔올이란 성분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이 냄새를 상큼하고 시원하게, 싫어하는 사람은 고약한 냄새로 느낀다. 실제 내 친구 중 한 명은 물냉면 위에 얹은 오이가 육수에 잠기기 전에 심혈을 다해 골라내는데, 오이에서 “썩은 물 냄새”가 나기 때문이란다.

사실 쓴맛을 내는 성분은 이동이 불가능한 식물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무기다. 커피의 카페인, 귤껍질 안쪽의 헤스페리딘, 콩의 사포닌, 메밀의 루틴, 상추의 락투신 등이 모두 천적에겐 치명적인 독성물질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쓴맛이 난다. 독성물질을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겠지만 무사히 씨앗을 맺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선 별수 없다.

여하튼, 나는 오이를 좋아한다. 지금 냉장고 채소 칸에 오이 아홉 개가 있지만 아마 3일도 못가 사라질 것이다. 오이를 노리는 천적이 나 말고 또 있으니, 바로 술먹고 난 뒤 우적우적 오이 한두 개 정도는 가볍게 먹어치우는 남편이다. 시장으로 산책 다닐 때마다 냉장고에 오이 채워놓기 바쁘다. 남편 몸에 PAV 유전자를 몰래 심어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이를 심을 땅도 없고. 아, 글도 다 썼으니 오이나 하나 씻어 먹어야겠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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