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그림의 말들 - 빈센트 반 고흐(2부)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탕기 영감의 초상(빈센트 반 고흐, 1887~8, 로댕미술관)
아를의 여인(빈센트 반 고흐, 1888,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아를의 밤의 카페(지누 부인) (폴 고갱, 1888,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교차, ‘탕기 영감의 초상’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노인이 눈을 살짝 내리고 앉아있다. 무슨 상념에 잠긴 것인지 눈빛이 깊고 고요하다. 색채가 현란한 우키요에(일본 판화)를 배경으로 한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의 초상’이다.

파리로 건너온 고흐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짐을 푼 다음 날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첫 작품은 자화상이다. 이 역사적 순간,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은 모양이다. 고흐는 일생에 자화상 36점을 그렸는데 27점을 파리에서 그렸다. 그는 파리 화단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코르몽이 연 몽마르트르 아틀리에를 다니며 데생을 공부한다. 3개월 다니고 말았지만, 그가 그토록 원한 ‘화가 친구’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만나 우정을 키운다.

고흐는 앙데팡당전에 전시된 쇠라의 그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 충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점묘법으로 그려졌는데, 팔레트 위에서 색을 섞지 않고 순색을 캔버스에 점찍듯이 해서 그린 작품이다. 관람자는 병렬된 작은 색들을 분리하지 않고 섞어서 보게 되는데, 이 방식은 물감을 혼합하는 전통적 방식보다 더 순순하고 강렬한 색을 표현할 수 있다. 쇠라의 이 작품을 본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은 신인상주의라고 했다. 파리에서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가 교차하고 있었다.

그동안 테오와 편지로만 근황과 예술을 논한 고흐는 테오와 함께 지내면서 새로운 예술을 마음껏 토론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테오는 날이 갈수록 지쳤다. 매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온 테오에게 고흐는 독자적 예술론을 펼치느라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 온 손님들과 예술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 번번이 싸우는 바람에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게 됐다.

“나 역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만큼은 마음 편히 쉬고 싶은데 형은 잠시도 나를 내버려두질 않아. 더는 못 참겠으니 아예 여기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중략) 형 속에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들어 있어. 한 사람은 드문 재능을 가진 진정한 예술가이고 또 한 사람은 이기적이고 무정한 인간이야. 이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내게 말을 걸어오니까 듣는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어. (중략) 게다가 나도 형을 지원하는 일을 그만둘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하지만 그는 예술가야. 그것도 아주 드문 재능을 가진 예술가. 그런 그를 모른 척한다는 것은 화상으로서, 한 사람의 성실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 돼. 형은 반드시 후세에 길이 남을 멋진 작품을 만들게 될 거야.”(테오가 자신의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

형의 예술성을 높이 사면서도 그의 괴팍함에 괴로워하는 테오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흐는 이 시절 테오의 화랑에서 테오의 소개로 고갱을 만났다.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 살 연상이고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다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35세에 자신의 재능을 찾아 작품활동에 뛰어들었다. 내성적인 고흐는 외향적이면서 이 지적인 멋쟁이 화가에게 호감을 품었다. 반면 고갱은 화상인 테오의 도움이 필요한 터라 마지못해 고흐를 상대했다. 시작부터 어긋난 이 만남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시절 고흐는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에 심취했다. 우키요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의 에도시대에 유행한 전통 판화로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 즉, 당시의 이모저모를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고흐는 우키요에를 무작정 따라 그리거나 자신의 그림 속에 넣기도 했다. 바로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처럼. 이렇게 고흐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우키요에에 기반을 둔 일본풍 양식을 통합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간다.

반 고흐의 의자(빈센트 반 고흐, 1888, 런던 국립미술관)
고갱의 의자(빈센트 반 고흐,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그토록 기다리던 고갱이 오다

테오에게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 게다가 알코올 도수 70도를 넘나드는 독주 압생트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건강이 나빠지고 그림조차 팔리지 않자 초조해진 고흐는 파리를 떠나 아를로 향한다. 네덜란드 시골 마을 출신인 그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 춥고 음습한 도시보다 남부 프랑스의 따뜻함과 자연이 절실했다. 그가 떠나기 전 탕기에게 선물한 그림이 바로 ‘탕기 영감의 초상’이다. 탕기는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화가들에게 돈 대신 그림을 받고 물감이나 화구들을 주는 화상이었다. 그는 가난한 화가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불렸다. 특히 고흐 그림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고흐가 자살했을 때 장례를 지원하고 장례식에 참가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탕기가 사망하자 조각가 로댕이 이 그림을 탕기의 딸로부터 매입했다. 이 그림은 현재 로댕박물관에 전시돼있다.

1888년, 아를로 간 고흐는 노란 집에 머물며 화가공동체 만들기를 희망했다. 베르나르를 포함해 몇몇 화가에게 제안했으나, 고갱만 응했다. 고갱은 자신의 빚을 청산해주고 앞으로 자신의 그림을 팔아줄 테오와 거래할 생각으로 아를로 갔지만, 이를 모르는 고흐는 고갱이 올 날만을 기다렸다. 자신의 방은 초라하지만 고갱을 위해 비싸고 안락한 가구를 샀으며, 아를의 공원을 그린 작품에 ‘시인의 정원’이란 제목을 붙여 고갱의 방 한가운데에 걸었다. 해바라기 연작도 그의 방을 꾸밀 목적으로 그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고갱이 왔다. 둘은 날이 좋으면 함께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고 흐린 날이면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같이 지내기에는 개성이 너무 강한 두 사람은 금세 삐걱 거렸다. 하루는 카페 주인 지누 부인의 초상화를 동시에 그렸는데 서로 상대방의 작품을 비난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흐는 ‘지누 부인을 천박하게 그렸다’고 고갱에게 화를 냈으며, 고갱은 ‘술집 여자를 고상한 척 그렸다’며 고흐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고흐는 이렇게 쉽게 공동생활이 끝나리란 걸 예상하지 못하고 의자 두 개를 나란히 그리는데 바로 ‘반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다.

‘고흐의 의자’는 카펫도 없고 팔걸이도 없는 초라한 나무 의자이며, 의자 위에는 담배쌈지와 그의 자화상에 자주 등장하는 파이프가 놓여있다. ‘고갱의 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고 의자 위에는 계몽과 지식을 상징하는 촛불과 책이 놓여있다. 고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의자들을 그렸을까. 초라해 보이는 자신과 세련돼 보이는 고갱을 의자로 재현한 듯하다.

고갱은 이때 고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게 ‘해바라기를 그린 빈센트’다. 그림 속 고흐는 술에 취해 눈이 거의 감긴 상태이며, 해바라기는 잎이 다 떨어진 흉측한 모습이다. 고흐는 자신을 미치광이로 표현한 것에 격노해 들고 있던 압생트 잔을 고갱에게 던졌다. 아를에 온 지 두 달 만에 고갱은 아를을 떠나려했으며, 혼자 남겨질 것 같아 불안했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다.

고갱은 떠났고 아를의 정신요양원에 입원한 고흐는 2주 후에 노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그리고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노란 집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흐는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으며, 주민들의 탄원으로 노란 집은 경찰에 의해 폐쇄됐다.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탄원서에 서명한 것을 안 고흐는 절망했다.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요양원을 제 발로 찾아갔다. 그런 절망 속에서 ‘별이 빛나는 밤’이 탄생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 (폴 고갱,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흐와 테오, 나란히 잠들다

이 무렵 벨기에 브뤼셀에서 제18회 뱅전이 열렸고 피사로ㆍ로트레크ㆍ고갱 등과 함께 고흐의 그림이 초청받았다. 이 전시에서 고흐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다. 그의 작품 중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판매된 작품이다.

몇 달 후 파리에서 앙데팡당전이 열렸고 고흐도 이 전시에 초청받아 그림 10점을 냈다. 대중들이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동료 화가들은 그의 그림에 경악했다. 이때 테오는 의사인 가셰 박사를 알게 되고 고흐를 가셰 박사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긴다.

오베르로 거처를 옮긴 고흐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70일 동안 머물면서 80여 점을 그렸는데 그의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도 이때 그렸다. 고흐는 그 밀밭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장례식에는 테오와 베르나르, 탕기 영감, 가셰 박사 등 7명이 참가했다. 장례 후 테오는 고흐의 주머니에서 미완의 편지를 발견했다.

“(생략) 어쨌든 나는 내 생애를 그림에 바쳤어. 그것은 예술가의 숙명이기도 하니까 달게 받아들이자. 그러나 문제는 바로 너야. 너는 화상이 아니라 예술가라고. 앞으로의 네 인생을 어떻게 살 거니….”

6개월 후, 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린 동생 테오도 급작스레 사망했다. 고흐는 그림을 그린 10년간 유화 860점과 수채화 1300점, 소묘 등 총2100여 점을 남겼다. 오베르에는 고흐와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참고 서적] 고흐(주디선드 지음, 남경태 옮김, 한길아트), 반 고흐 마지막 3년(임교택, 책생각), 빈센트 반 고흐(이규희, 지경사), 반 고흐(페데리카 아르미랄리오 지음, 이경아 옮김, 예경), 고흐 37년의 고독(노무라 아쓰시 지음, 김소운 옮김, 큰결)

※ 문하연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좋아해 전시를 보고 연계강의를 들었다. 그렇게 미술사 강의를 찾아 듣고 공부한 지 8년이 됐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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