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다 본 원적산공원은 산을 향해 달려가다 멈춰 고인 작은 옹달샘 모양이다. 그 한줄기는 작은 고개를 넘어 청천농장으로 스며들어 분지를 만들고 앞으로 내쳐 달리던 기세가 한풀 꺾여 뒤로 와 멈춘 곳에 장수산이 있다. 부평이 겪어온 역사의 굽이굽이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시내에서 원적산 공원을 가려면 대개 세 갈래 길을 이용하곤 한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길은 사람들에 치이며 묏골마을을 끼고 한달음에 걸어가는 직선 코스다.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는 사람들의 풍경에 가벼운 흥분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우울한 심정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장수산을 한 바퀴 돌아가는 방법도 괜찮다. 마치 박제된 도시처럼 여전히 무채색으로 남아 있는 청천농장 한복판을 지나면 오래된 시간들을 옷자락에 담아 쓸고 오는 기분이다.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싶지 않을 땐 별 생각 없이 원적산길을 따라 걷다 갑자기 숨어버리듯 꺾어드는 약수터길로 접어들어도 좋다. 자못 고즈넉한 산길을 넘다보면 그대로 무심해진다.

주변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어릴 적 약수터에 가기 위해 이곳을 찾을 때마다 인근 청천농장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양계장을 슬금슬금 피하며 지나다녔다던데, 이제는 주말이면 모여드는 가족들의 웃음소리로 골 전체가 화사해지니 오히려 그 웃음이 쓸쓸해 보일 때도 있다.

공원에 왔으면 이제 산을 향해 올라가 보자. 공원 옆으로 살짝 치우쳐 나 있는 샛길로 올라가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진 산길에 당황스러워진다. 그곳엔 황토밭을 가는 농부만이 산길을 지키고 섰는데 산 중턱쯤에서 돌들을 골라내는 모습이 언뜻 돌내골 뫼밭을 개간하던 [변경]의 명운을 떠올리게 한다.

개척의 시대가 이런 모습이었을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착각에 빠져든다. 잘 찾아보면 길은 나 있으나 오르기가 힘들고 적막함이 무섭다. 그리 권하고 싶은 길은 아니다.

산을 둘러서 정상을 향하는 길은 많아도 편한 것으로 치자면 약수터로 향하는 길이 재미는 없어도 그 중 낫다. 입구로 다가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산림보호 표어판이 흥미를 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시대마다 새로 박아 놓은 것들일 텐데 박물관에 옮겨놓아도 훌륭한 전시품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말라가는 내를 따라 조금 오르면 계단을 만나고 여기서 중턱까지는 높은 나무들 사이를 그저 오르는 일만 남는다. 중간 중간 길 옆에 나타나는 무덤들이 그나마 심심치 않게 길벗을 해주는데 그 사연이야 알 수 없지만 한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걷는 등산길이 불현듯 무거워져 잠시 그 앞에 발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에서 북쪽을 향해 핥으며 바라보는 것이 좋다. 계양산 만일사 누대에 올라서서 배들이 오리처럼 떠다닌다고 묘사한 이규보의 마음도 느껴지고, 바로 앞에 보이는 월미도는 징맹이고개에 중심 성을 쌓아야했던 조선 정부의 다급함을 이해하게 만든다.

계양산에서 내리뻗은 이 산줄기가 남쪽으로 향하고 그 안에서 수 천, 수 만 년 동안의 삶이 이어져왔다는 생각을 해보면 아랫녘에 가득 차 있는 도시가 허망한 신기루처럼 보이기도 한다. 민예학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직선은 조선의 선이 아니’라고 평했던데 되밟아 내려가야 하는 산의 끝에선 다시 직선이 시작되고 있다. 도시는 대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물결 사이에 떠 있는 것이라던 그의 말이 새삼 곱씹어진다.
원적산과 원적산공원은 부평이 갖고 있는 보물 중의 하나다. 최근 생태도로, 생태하천 등과 함께 인천의 S자 녹지축을 살리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안다.

산과 하천만을 살리려는 노력은 원적산 역시 품을 팔아 가끔 와야 하는 나들이 공간으로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도시 속의 산은 도시와 함께 생명을 같이 해야 한다. 산 위에서 시작된 능선의 물결이 도심 속으로 들어가 함께 물결을 이루기 위해선 골목과 건물, 거리와 공원, 모든 것들이 산과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계획돼야 할 것이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新) 디자인의 도시를 고민해보자.
▲ 김현석
인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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