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중학생 때부터 아빠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시절 엄마와 아빠는 밤마다 다투는 일이 잦았다. 원인은 아빠의 외도였다. 아빠가 없을 땐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험담과 하소연을 들어야했고, 아빠가 집에 온 순간부터는 또 언제 싸울지 알 수 없는 터질 듯한 긴장감에 가슴을 졸였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뭣에 홀린 듯, 안방 문을 열고 말했다. “그냥 이혼하세요.” 고함을 치며 싸우던 아빠는 당황한 듯했다. “너… 뭐라고 했어!” “이렇게 만날 싸울 거면 이혼하시라고요.” 아빠가 나를 노려보더니 탁자 위에 있던 가위를 손에 들고 내 머리를 한 움큼 쥐었다. “다시 말해봐.” “이혼하세요, 제발!” 서걱. 시커먼 것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자식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던 아빠였기에 내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단 하나의 생각만 머릿속에 휘돌아다녔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딱 죽어야겠다.’ 방법은 아침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죽기로 결정하고 나니 맘이 편해져 곧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엄마가 머리맡에 앉아 내 머리를 만지며 울고 있었다. “엄마가 머리 예쁘게 빗겨 줄게, 걱정하지 마.” 나는 왠지 안심했다.

그날부터 아빠를 쳐다보지 않았다.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아빠는 나 들으란 듯 화를 냈지만, 그것이 허세라는 걸 직감했다. 가르마를 옆으로 옮겨 잘린 머리를 덮었다. 머리 모양이 바뀐 걸 눈치 챈 친구들에겐, 껌이 묻어서 떼다가 머리카락이 녹았다며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친구들은 내 머리 모양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점점 조용하고 새침해졌다.

ⓒ심혜진.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내 대학 졸업식 날이 왔다. 군대 간 남동생을 뺀 식구들이 졸업식에 왔다. 그 사이 부모님의 격렬한 싸움도 끝이 났고, 나는 나대로 대학 생활의 자유를 한껏 맛봤다.

그 무렵부터였다. 아빠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식구들 속을 있는 대로 썩였지만 배운 것, 가진 것 없이 오로지 몸뚱이 하나로 가족 먹여 살리느라 애쓴 것만은 분명했다. 돈 없다는 엄마를 설득해 동화책 세트를 사준 것도, 예쁜 머리핀을 상자가 넘치도록 사주며 흐뭇해한 것도, 주말마다 산으로 바다로 우리를 데리고 다닌 것도 아빠였다. 내 머리카락을 자른 직후, 아빠는 책 좋아하던 나를 서점에 데리고 가 책을 고르게 했고, 백화점에서 팥빙수도 사줬다. 아빠가 내내 그 일로 마음 아파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마음을 10년 가까이 모른 척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빠가 왠지 측은해 보였다. 망설이다가 아빠에게 학사모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학사모를 받아 쓴 아빠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아빠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가족과 나를 힘들게 한 기억이 마음에서 아빠를 밀어냈다. 졸업 1년 뒤 나는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고, 다시 1년 후 보증금을 모아 독립했다. 내가 집에 가는 날은 1년에 고작 서너 번뿐이었다.

어느 해 어버이날을 맞아 카네이션 화분을 샀다. 빵집에 들러 소보로빵도 몇 개 집었다. 아빠는 소보로빵을 유독 좋아했다. 안방 문 앞에서 나를 반기는 아빠에게 대강 고개만 꾸뻑 숙인 후 카네이션과 빵 봉지를 식탁에 놓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마주친 아빠의 눈빛은 그날따라 순해 보였다.

한 달 후, 아빠가 돌아가셨다. 사인은 당뇨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미운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슬픔이 덜했을까. 갑작스런 죽음 앞에 미움도, 원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식에게 소소하게 돈 쓰는 게 낙이었던 가난했던 아빠는 자신에게 인색했던 탓에 남긴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다. 유품 사이에서 졸업식 날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다. 어색하지만 어쩐지 밝아 보이는 아빠의 표정. 아빠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아빠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빠의 마음을 제 때 받아들이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났다. 좋은 건 좋은 대로, 상처는 상처대로, 옅어지기도 또렷해지기도 하면서 아빠와의 기억이 다듬어져 간다. 이제 아빠를 생각해도 눈물이 쏟아지지 않는다. 돌아오는 어버이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빵집에 갈 것이다. 사실 소보로빵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기도 하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아빠의 안녕을 빌며.

※심혜진은 2년 전부터 글쓰기만으로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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