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41)
사산조 페르시아 수도 비샤푸르

[인천투데이 허우범 시민기자]

이란의 남부에 위치한 비샤푸르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비샤푸르 성.

아시아의 서쪽, 고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의 나라.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榮華)가 깃든 이란으로 향한다. 이란은 서구와 충돌하며 동방문명을 꽃피운 고대 페르시아의 영광과 자부심이 넘치는 나라다. 하지만 고대의 화려한 영광도 섭씨 50도를 육박하는 더위 속에 한낱 꿈이었던가. 해발고도 2000m를 넘는 고원지대는 빛바랜 석주(石柱)들만 열풍(熱風)을 이겨내고 있다.

이란의 남부에 위치한 비샤푸르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비문에 의하면 비샤푸르는 샤푸드 1세가 266년에 창건했다. 비샤푸르는 한 마디로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다. 지금도 남아있는 직사각형의 성벽과 해자는 당시 이 도시가 철옹성이었음을 알려준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고구려의 축성법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비샤푸르 성벽터.

널따란 언덕의 궁성 터는 불에 탄 듯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도성을 에워쌌던 반원형의 성벽들은 지금도 20여m의 간격을 두고 정연하게 둘러있다. 생수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며 성벽 사이를 거닌다. 소용돌이 역사가 성벽 틈바구니에 흙먼지와 함께 켜켜이 쌓여 있다. 성벽의 모양이 신기해 자세히 살펴본다.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온다.

돌과 잡석을 쌓아 만든 성벽은 다시 블록 형태로 잘 다듬은 성돌을 안팎으로 쌓아 올렸다. 게다가 평지의 도성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 중턱에는 유사시 피란 성으로 사용하던 석축의 산성까지 남아 있다. 그야말로 고구려 산성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고구려 성은 판석 사이에 잡석을 넣어 충격과 파괴에 강하게 만들었는데, 그 근원이 바로 이곳 사산조 페르시아에 있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축된 성을 드문드문 보았다. 재료만 흙과 돌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치와 성가퀴, 옹성의 축조기술, 특히 평지의 성과 배후 산성이라는 고구려 특유의 도성 방어체계는 중앙아시아 호라즘 지역의 아야즈 카라(=성)의 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2~4세기 유적으로 평지 도성과 배후 산성을 하나로 묶는 도성 방어체계시스템이었다. 당시에도 고구려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떠올리게 하는 환호였다. 고구려 성의 특징인 ‘치’의 시설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성곽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축성 기법이 이곳 서아시아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고대 초원길을 누볐을 고구려인의 기상에 온몸은 흥분의 열기로 달아오른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고구려를 이은 초원길
 

고구려 성 가운데 치(雉)가 잘 나타난 백암성.

이란을 비롯한 서아시아 지역의 도성과 성곽에 돌을 사용한 것은 이란의 고대 유적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앗시리아, 바빌론 등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왕조나 카스피해 동쪽의 중앙아시아와 천산산맥 동쪽의 중국 서역지역에서 모두 흙을 이용한 벽돌(혹은 블록)을 이용한 것과 다르다. 페르시아의 여러 유적에 장대한 석축 건조물이 나타나는 것은 이란의 고원 곳곳에 널린 석재를 활용한 것이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 시기에 석축은 이전 시대의 장대한 석재가 아니라 블록 모양으로 작게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축조 기법이 크게 유행했다.

성가퀴와 치, 옹성 등 돌로 만드는 고구려의 성벽기술이 유행하던 시기와 거의 같은 양상을 보여주는 유적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건축물과 성벽밖에 없다.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하던 성곽을 철옹성으로 만든 견고한 방어 설비와 옹성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그것과 기술적 계보를 같이하며 같은 시기 존재하던 유적임이 분명하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고구려는 대략 7000km 이상 떨어져있었다. 동서의 두 세력은 어떻게 교류가 가능했을까. 답은 명료하다. 초원길로 중앙아시아에서 조우하고 축성 방법과 기술 등을 보고 익혔던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초원길의 중심에 있다. 고대 초원길은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았다. 초원을 오가며 다양한 문물을 교류하며 저마다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익혔던 것이다.

이는 비단 성곽의 축조술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사리 모양의 팔메트 문양, 천장을 우물(井) 모양으로 장식한 말각조정(抹角操井), 4~5세기 사산조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사마르칸트 북방에서 발견된 허리띠 장식에 새겨진 철갑기병단 등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들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신라·가야와도 교류
 

육각형 무늬의 사산조 페르시아 유리잔(왼쪽)과 경주의 송림사 석탑에서 출토된 유리잔.

이러한 교류는 고구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테헤란의 국립 유리ㆍ도자기박물관은 이란에서 출토된 유리 제품과 토기 가운데 명품만을 선별해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 가운데 단연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소뿔 모양으로 만든 파르티아의 각배(角杯)와 커트 글래스(cut glass)라 불리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이다. 이 두 유물이 5~6세기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도 출토됐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각배와 유리잔 이외에도 뱀과 개구리 등 동물들을 부조처럼 만든 도자기, 목걸이를 문 두 마리의 새 장식 등 사산조 페르시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들이 발굴됐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의 삼국시대에도 동북아시아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과 교류를 위해 중원 너머 중앙아시아까지 뻗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초원길이었다.

중국 돈황 막고굴 17호굴 벽화에 보이는 유리잔.

※허우범 시민기자는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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