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월미도 문화의 거리' 조성...시민 공간으로 거듭나
월미공원 숲길과 한국전통정원 산책으로 힐링
인천, 슬픈 이민의 시작...한국이민사박물관 필수 코스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달을 닮은 섬 월미도(月尾島). 월미도는 1920년대 전까지는 섬이었다. 월미는 그 모양이 반달처럼 휘어졌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월미도는 1914년 경기도 부천 영종면에서 인천부에 편입됐다. 1918년에는 인천 내항 갑문이 설치되면서 일제에 의해 관광지로 개발되고 육지와 이어졌다. 여름은 물론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먼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대표적인 관광휴양지였다. 당시 있었던 월미도 조탕(潮湯)은 지금도 해수탕으로 명맥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월미도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황무지(荒蕪地)가 됐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희생자들을 위해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월미도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기지로 통제돼 있었다. 1987년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고 2001년 관광특구로 지정되고 월미산도 개방되는 등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인천 유일의 관광특구, ‘월미 문화의 거리’

월미도는 바다와 같이 물이 차고 빠지면서 사람들도 들어오고 나간다. 일렁이는 파도와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먼 바다로 떠나는 마도로스의 눈물이 연상돼 애잔하다.

남쪽으로 인천항을 오가는 선박과 웅장한 인천대교를 바라볼 수 있다. 서쪽으로는 영종도가 바로 눈앞이다. 물이 높이 들어오고 석양이 붉게 물들면 이국적인 정취도 느낄 수 있다.

‘문화의 거리’에는 수많은 횟집과 카페, 주전부리 노점, 놀이시설로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놀이시설에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떨리는 ‘바이킹’이 있고, 타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많은 유명한 ‘디스코팡팡’이 있다.

월미도 선착장에는 인천 근해를 유람하는 배도 다닌다. 인천 앞바다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또 영종도까지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다. 지금도 1시간 단위로 배가 운항하고 20분이면 영종도 구읍뱃터에 닿을 수 있다. 배를 타면 갈매기에게 줄 ‘새우깡’ 준비는 필수다.

월미 문화의 거리에는 오는 5월 3일부터 6일까지 번영회 주관으로 ‘제1회 월미뮤직페스티벌’이 개최된다. 타이거JK, 윤미래, 홍진영, 비지, 헤이즈와 비와이가 공연한다. 특별한 체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년 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월미은하레일’이 ‘월미바다열차’로 재탄생한다. 오는 6월 이후 본격적인 운행을 위해 점검 중이며, 인천교통공사는 하루 8량 4편성으로 월미도 외곽 약 6㎞를 운행할 예정이다. 인천 유일의 관광특구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회다.

인천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월미공원 전망대

반세기 동안 군사기지였던 월미산은 2001년 시민들에게 개방돼 공원으로 조성됐다. 평일에도 산책하는 사람들로 발길이 이어진다. 오랫동안 통제된 곳이어서 나무들이 울창하게 번성해 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숲길을 오르며 신선한 공기를 만끽할 수 있다.

월미공원 정상에 오르면 인천 내항와 외항을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는 때가 맞으면 인천대교를 지나 인천항 갑문을 통과하는 크루즈선과 화물선 등을 볼 수 있다. 월미산 정산을 갈 때에는 15분 단위로 운행되는 물범열차도 있다. 30~40분 거리를 1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월미공원을 가면 한국전통정원을 꼭 가야한다. 1만5000여 평에 조성된 이곳은 한국의 전통 정원과 한옥, 농촌문화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토끼를 방목하는 ‘토끼언덕’도 있고, 사슴도 볼 수 있다.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으며 가족과 한적한 오후를 즐길 수도 있다.

이민의 역사 알 수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특별한 공간이다.

우리나라 공식 이민은 1902년 제물포항에서 시작됐다. 그해 12월 22일 이민자 121명을 태운 갤릭(Gaelic)호는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 고베항을 경유해 1903년 1월 13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신체검사 등에 탈락된 사람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미국에 첫 이민을 간 사람은 86명이다. 대부분 인천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박물관은 이들의 개척자 정신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천 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의 뜻을 모아 마련됐다.

박물관에는 이민을 떠날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이민생활의 어려웠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를 되새기며 머나먼 이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했던 선조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했던 일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곳이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어렵게 생활했던 한인들은 이민자로서의 서러움과 조국에 대한 향수로 매일같이 눈물을 흘렸다. 노역에 가까운 농장 일을 하면서도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특히 일제 침탈로 조국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기꺼이 독립자금을 내놓았다.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일제 치하의 부당함을 해외에 알리는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교육에 대한 열의 또한 높았다. 조국부강과 공업입국의 염원을 담아 당시 한인 교육기관이었던 ‘한인기독학원’ 매각 대금 15만 달러를 고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설립된 학교가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이름을 딴 인하대학교다. 인하대학교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정신적 귀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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