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우리 몸은 수천조개의 세포로 이뤄져있고 세포 대부분은 핵을 가지고 있다. 오직 적혈구 세포만이 핵의 자리를 헤모글로빈에게 내주고 산소를 운반하는 일을 한다. 각각의 핵 속에는 염색체 23쌍이 들어있으니 우리 몸속에 있는 염색체 개수는 핵의 개수에 46을 곱하면 된다. 염색체는 한 사람의 유전정보를 담은 DNA 한 가닥을 말한다. 돌돌 말려 뭉쳐있는 DNA 한 가닥을 쭉 늘이면 1미터가 넘는다. DNA의 길이를 1.8미터라고 적어 놓은 책도 있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키 만하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은 생물학의 기본 지식이 됐지만, 이를 밝히는 과정에는 과학자들이 오랜 시간 흘린 피땀이 서려 있다.

염색체는 염색이 잘 된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염색하면 핵을 현미경으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1869년 스위스의 생화학자가 외과용 수술 붕대에 묻어있던 고름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중, 백혈구의 핵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을 발견했다. 이듬해 독일의 생화학자가 이 물질이 단백질과 다른 성분이며 물에 녹으면 산성을 띤다는 걸 알아냈다. ‘핵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뜻에서 ‘핵산’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어 핵산을 이루는 구성 물질 중 물에 녹았을 때 염기성을 띠는 핵염기도 찾아냈다. 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티민으로 DNA 사슬을 만드는 핵심 요소다.

위 발견을 바탕으로 1950년대 들어 DNA 구조를 밝히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분자 모양을 알아내면 그 분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연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던 과학자 네 명이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원자탄 개발에 몰두한 모리스 윌킨스, 전쟁 중 폭발형 지뢰를 연구한 프랜시스 크릭, 석탄 채굴에 사용할 지뢰를 개발한 로절린드 프랭클린, 그리고 천재 과학자 제임스 왓슨으로 모두 런던 킹스 칼리지의 과학자다. 이들 중 세 사람은 핵산 연구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공로로 1962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의 연구가 없었다면 DNA 구조를 밝히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노벨상을 받지 못한 한사람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다.

프랭클린과 윌킨스는 한 연구실 동료였다. 하지만 둘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당시 킹스 칼리지에서는 여성 학자들에 대한 성차별이 만연했다. 남성과 여성이 다른 식당에서 식사해야했고, 여성은 나이나 업적을 불문하고 교수 휴게실을 사용할 수 없었다. 프랭클린은 나머지 세 선임자에게 연구 업적의 공로를 나눠야한다는 압박과 함께 막말을 듣는 등, 인격적 괴롭힘을 당했다. 크릭은 “우리는 그녀를 얕잡아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던 게 사실”이라 회고했다.(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프랭클린은 열악한 환경과 차별 속에도 연구자 가운데 유일하게 DNA 구조를 알아볼 수 있는 X선 회절 사진을 찍었다. ‘51번 사진’으로 불리는 이 사진은 그가 100시간에 걸쳐 얻어낸 것이다. 프랭클린이 완벽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사진을 공개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같은 연구실에 있던 윌킨스가 이 사진을 경쟁 연구팀 소속이던 왓슨에게 넘겼다. 프랭클린의 동의를 얻지 않은 건 물론이다. 왓슨은 이 사진으로 DNA가 이중구조라는 걸 알아냈고, 이를 바탕으로 DNA 모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프랭클린은 1958년 37세에 난소암으로 사망했다. 연구 중 X선에 과도하게 노출된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나머지 세 연구자는 1962년 노벨상을 수상했고, 프랭클린의 업적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혔다. 노벨상은 사망한 이에겐 수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긴 하지만, 프랭클린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한 연구에 대해 최대 세 명에게만 수여하는 노벨상이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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