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캡틴 마블 (Captain Marvel)

애너 보든, 라이언 플렉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외계 크리 문명의 수도 할리. 캐롤(브리 라슨)은 엄청난 초능력을 가진 크리족의 전사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캐롤을 크리족 사람들은 비어스라 부른다. 캐롤은 매일 밤 과거의 기억으로 추정되는 악몽을 반복해 꾸지만, 그녀의 상관인 욘(주드 로)은 힘을 통제하고 과거의 기억은 묻어둬야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어느 날 변방 행성으로 출정을 나갔다가 스크럴 종족에게 붙잡힌 캐롤은 기억을 스캔당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지구에서 살았던 기억의 조각을 찾아낸다. 스크럴 종족으로부터 탈출하는 과정에 우연히 지구에 불시착한 캐롤은 과거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새로운 우주 영웅, 캡틴 마블의 탄생을 알린다.

솔직히 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첨단 컴퓨터그래픽(CG)으로 도배한 공상과학(SF)물에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마블 시리즈는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캡틴 마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건, 오로지 마블 스튜디오의 ‘첫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영화’라는 타이틀 때문이다.

물론 히어로물은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눈에서 광선 나오고 불주먹이 날아가는 현란한 CG도 내겐 따분하기만 했다. 광활한 우주공간을 날렵하게 날아가는 우주선 역시 썩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주인공 비어스, 아니 캐롤에게는 깊이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익히 보아온 남성 영웅은 하나같이 이전까지 몰랐던 잠재적 능력을 발견한 뒤,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그 능력을 극대화한다. 슈퍼맨이든 아이언맨이든, 그것이 영웅서사의 정석이었다. 그러나 여성 히어로 캡틴 마블은 시작부터 달랐다.

영화 시작부터 캐롤은 이미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 영웅과 달리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억누를 것을 주문받는다. “너는 너무 감정적이야.” “너를 통제하지 않고는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없어.” “너를 통제하고 맨 주먹으로 나와 맞서서 이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전사가 되는 거야.” 캐롤이 상관으로부터 매일같이 듣는 소리다.

어? 이상하다. 낯설지가 않다. 너무 감정적이라 사리분별을 할 수 없다는 말, 수시로 자신을 단속하고 통제하라는 말, 남성의 기준에서 경쟁해서 이기면 인정해주겠다는 말…. 여자들이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자란 소리다. 지위와 권력을 가진 이가 계속 반복해 주입하는 이 말은 어느새 진리가 된다. 끊임없는 주문에 여자들은 그 말을 자신의 목소리로 착각하고 지레 주눅 든다. 이것이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캐롤은 지구에서 과거의 기억을 찾으며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교사로부터, 미 공군 상사로부터 끊임없이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끝내 조종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성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남자어른의 가스라이팅에 맞설 수 있던 힘은 조종사 친구인 마리아(라샤냐 린치)와 로슨(아네트 베닝) 박사 등 여성 동지들의 응원과 지지였고, 결국 로슨 박사로부터 캡틴 마블이 되는 능력을 받는다. 그러나 캐롤의 투쟁 기억은 삭제됐다. 대신 선한 인상의 남성 상관 욘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것을, 그래야만 전사가 될 수 있다는 주문을 받으며 자신을 억눌러왔던 것이다.

캐롤이 캡틴 마블로 각성하는 과정은 그동안 남성의 가스라이팅에 억눌려있던 자신의 잠재력과 직관을 믿고 그것을 최대치로 분출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탄생한 여성 영웅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싸움을 치른다. 이 과정은 전멸해야할 적으로 규정해온 낯선 존재(스크럴 종족)가 사실은 악의 축이 아닌 그저 다른 존재, 평화롭게 공존해야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영화 포스터에 있는 문구 그대로 시대는 새 영웅을 원한다. 그저 힘만 세고 이기면 다가 아니라,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캡틴 마블은 보여준다.

※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상황 조작으로 타인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 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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