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과 초원을 오가며 신기술을 발전시킨 글로벌 고구려를 만나다"

[인천투데이 허우범 시민기자]

코베트다크 산맥이 병풍처럼 두른 니사 유적지.

투르크메니스탄은 중앙아시아 서쪽에 있는 국가다. 옛 소련이 붕괴할 때 독립했는데 아직도 중앙아시아 5개 국 중 사회주의 체제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 석유와 가스 등 풍부한 지하자원은 소수 권력자가 독점한다. 이로부터 얻은 부(富)도 결국 이들이 좌지우지한다.

수도인 아쉬하바드는 사막 속에 세워진 도시다. 황금으로 치장된 사원들, 대리석으로 만든 광장과 도로가 도시를 더욱 눈부시게 만든다. 권력과 부의 정점에서 만들어진 황금도시는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 한 사막 속에 있음을 느낄 수 없다.

 

고대 파르티아제국의 초기 수도 ‘니사’

니사 유적지의 성터.

아쉬하바드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고대 유적지 니사(NISA)가 있다. 이곳은 고대 파르티아제국(기원 전 247~기원 후 226년)의 초기 수도였다. 중국 역사서에는 안식국(安息國)으로 알려진 곳이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코베트다크 산맥이 서남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다. 이 산맥 주위로 초기 농경문명이 평화롭게 유지됐다. 이 평화로움이 깨진 것은 기원 전 330년,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때문이다. 토착민들은 마케도니아에 저항하며 민족적 각성과 통합을 이뤘다. 이는 알렉산더 사후 왕국의 분열을 틈타 파르티아를 건국하는 원동력이 됐다.

파르티아는 철제무기를 갖추고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접목해 강력한 군사력을 완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쪽으로는 로마, 동쪽으로는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파르티아제국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번영을 가져온 첫 번째 주인이었으며, 중국과 고대 한국에 보이는 서역 문물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헬레니즘의 대표적 유물 ‘각배’

헬레니즘의 대표적 유물인 각배(角杯).

대리석 도로를 벗어나자 황량한 벌판이 폭염에 한껏 달아올라 있다. 니사 유적지를 알리는 푯말을 지나자 이란과 경계를 이루는 코베트다크 산맥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내리꽂히는 햇살에 흘릴 땀도 없이 성곽을 둘러본다. 여태껏 말을 아끼며 감시만 하던 안내자가 동서 문명의 교류로 탄생한 헬레니즘의 발상지가 바로 이곳이라고 열을 올린다. 이곳에서 출토돼 국립역사박물관에 보관중인 에로스상과 류톤(Rhyton)이라 부르는 각배(角杯) 사진도 보여준다. 각배는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짐승 뿔로 만든 이 잔은 원래 유목민족이 쓰던 것인데, 그리스인들이 신화를 접목해 전승함으로써 헬레니즘의 특징이 됐다.

각배는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진 대표적 문명 교류의 사례다. 신라와 가야고분에서 각배 모양의 토기 40여 점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서역계 토기의 특징은 어깨와 목 부분에 개구리, 뱀 등의 모양을 새기거나 붙이는 것이다. 각배와 함께 서역의 특징이 반영된 토기들도 많이 발굴됐는데, 이곳 파르티아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들에서도 흡사한 모양의 토기들을 볼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와 파르티안 기사법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보이는 파르티안 기사법.

파르티아 문명의 대표적 동방 전파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에서 볼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騎射法)이다. 이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어느 방면으로든 몸을 돌려 목표물을 맞히는 고급 기마궁술이다. 이를 위해서는 등자(?子)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등자는 말 위에서 몸을 비틀어도 안정적 자세를 유지하게 해준다. 이처럼 파르티아 기병이 착안한, 말 타고 사방으로 활 쏘는 장면은 고구려뿐 아니라 유라시아 유목문물에도 널리 나타나 있다.

파르티안 기사법이 주목되는 이유는 특이한 자세가 아니다. 바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기병술이다.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파르티안 기사법은 고구려가 초원길을 통해 파르티아 지역으로부터 중무장한 기병전술을 익혔음을 알려준다.

니사 유적지는 왕궁이었던 구(舊)니사와 이를 에워싼 상업과 주거 지역인 신(新)니사로 구분되는데 1948년 대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지금은 왕궁의 기초석과 성곽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대 파르티아의 흔적을 거닐다 보니 폭염 아래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철저한 고증 없이 어림짐작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문화에 대한 개념과 생각이 정립돼있지 않은 이곳에서 ‘역사적 복원’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리라.

 

고대 포도주 저장고와 각배

포도주 항아리를 묻었던 곳.

각배의 활용이 궁금해졌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안내자가 손을 잡아끌고 앞서 나아간다. 구덩이 서너 개가 파인 곳으로 안내한다. 고대 포도주 저장고였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포도주를 담은 병과 함께 기원 전 1세기 포도주의 출납을 기록한 아람 문자(Aramaic alphabet) 석판도 나왔다고 한다. 당시 고대인들의 포도주에 대한 기호(嗜好)를 잘 알 수 있다.

숙성된 포도주를 각배에 따라 마시며 동서양의 정보와 문명의 중개자 역할을 했던 니사. 화려했던 영화는 사막 위의 황금도시 아쉬하바드에 건네주고 흙먼지만 뒤집어 쓴 채 말이 없는 니사. 니사는 인류문명사에 일대 전기(轉機)를 마련해준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그러하기에 유네스코는 2007년에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그뿐, 모든 역사의 흥망성쇠가 그러하듯 니사는 황량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무너진 성벽을 뒤로하고 발길을 옮긴다. 순간, 온몸을 에워싸는 숨 막히는 바람은 ‘애잔함’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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