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잠자는 집시 여인

무지개 색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지팡이를 꼭 쥐고 잠들어 있다. 여인 앞으로 나란히 누운 만돌린, 그리고 여인의 목을 축여줄 물병이 서 있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사자 한 마리가 그녀 뒤에서 꼬리에 바짝 힘을 주고 서있다. 모래언덕 어디에도 사람의 발자국도 사자의 발자국도 없다. 비현실적 주제와 색감이 만나 신비롭고 동화 같으며 고요하다. 사자는 이 여인을 헤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 그림은 앙리 루소가 그린 ‘잠자는 집시’다. 그는 이 제목 옆에 부제를 달았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을 망설인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구도가 좀 이상하다. 사자는 옆모습이 그려져 있어 시점이 정면인 반면 여인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다. 시점이 다르다보니 잠든 여인은 곧 옆으로 굴러 떨어질 듯 보인다. 고의일까 실수일까.

앙리 루소(1844-1910)는 평생 그림을 배워본 적 없으며 어느 유파에도 속한 적 없는 ‘일요화가’다. 일요화가란 본업이 따로 있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를 지칭한다. 루소는 세관원으로 22년을 일했다. 파리로 들어오는 물건들의 세금을 받는 최하위 공무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 통행료 징수와 비슷하다.

루소는 이 그림을 만족스러워했다. 그래서 고향 라발시의 시장에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시장님께…저는 이곳 라발시의 시민입니다. 시장님께 외람되이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붓질을 배운 화가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을 한 점 추천하오니 부디 고향에서 구입해 소장하면 좋겠습니다. 추천작은 (잠자는 집시 여인)입니다. (중략) 가능하다면 1800프랑에서 2000프랑쯤 받고 싶습니다. (중략) 부디 시장님의 호의를 기대합니다.” 안타깝게도 시에서는 답이 없었다. 라발시에 걸릴 수 있었던 이 작품은 지금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셀프 추천이라니. 루소는 엉뚱하고 기발한 사람 같다.

만능 엔터테이너

앙리 루소는 양철장이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누나 셋과 남동생 하나가 있다. 어린 시절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아 유급을 두 번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19세에 변호사 사무실 급사로 취직, 30프랑을 훔치고 소년원에 한 달 동안 구금된다. 면죄부를 주는 조건으로 군대에 자원, 7년 복부 명령을 받는다. 복무 중인 1868년에 아버지가 사망한다. 실질적 가장이었기에 나머지 군 복무기간을 면제받고 돌아와 가족들과 파리로 이사한다. 다음해 25세의 루소는 18세의 클라망스 부아타르와 결혼한다.

자녀 9명을 두지만 8명은 일찍 세상을 등진다. 클라망스마저 37세에 눈을 감고, 딸 쥴리아만 루소보다 오래 살았다. 클라망스가 사망하고 11년 만에 조제핀을 만나 재혼, 행복을 꿈꿔 보지만 그녀 또한 결혼 4년 만에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런 그에게 그림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루소의 이력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하고 실력도 상당해 말년에 바이올린 레슨을 해서 생계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는 클라망스를 위해 ‘클라망스,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위한 도입부가 있는 왈츠’를 작곡했다. 이 곡으로 ‘프랑스 문학과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고 심지어 베토벤 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그림에 부제나 시(詩)를 붙여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뮤지션에, 시인에, 화가였으니 만능 엔터테이너라 하겠다.

늦깎이 화가···조롱과 멸시

루소는 40세가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49세에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위해 퇴직한다.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경쟁하는 ‘살롱전’에는 출품할 수 없었지만, 소정의 참가비만 내면 전시 가능한 ‘앙데팡당전’과 ‘낙선전’에는 꾸준히 참여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조롱하고 멸시했다.

“난쟁이 몸집에다 절구통 머리를 얹어놓고 자화상이라고 제목을 붙인 건 틀림없이 화가가 겸손하기 때문일 것이다.”(1890년 ‘낙선전’에 출품한 자화상에 대한 기사)

“루소의 작품을 보면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단돈 3프랑으로 기분 전환하는 방법으론 최고다. ‘루소는 손을 대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린 걸까?”

“루소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그렸다. 한마디로 하품 나는 작품이다. 그림 내용은 이렇다. 야생 사자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웬 여자가 몹시 지쳐 잠들었는데 사자는 그녀를 덮칠까 말까 고민 중이다. 관람객의 배꼽을 뽑는 작품이다. 그림속 사자도 어흥 하고 웃을 것이다.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부디 영광이 있기를.”(‘잠자는 집시’에 대한 비평 기사)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살롱전’의 아카데믹한 많은 그림들은 후대에 빛을 잃었다. 무슨 작품이 어떤 상을 받았는지조차 모른다. 반대로 그늘진 곳에서 그림을 그린 루소, 고흐, 고갱, 로트레크, 마티즈 등은 빛을 찾았다. 이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죽어서야 빛을 보면 무슨 소용이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죽어서도 빛을 못 보는 사람이 다수다. 이름을 남기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무명의 루소를 처음 알아봐준 사람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자리다. 알프레드는 루소의 그림 ‘전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래는 그가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기고한 글이다.

“화가는 하나의 인격이다.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모르는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꼭 조롱할 필요는 없다. (중략) 규격에서 벗어나는 건 현대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몽땅 미친 짓, 바보짓이라고 밀어두면 속편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의 어리석은 편견의 제물이 됐다.”

알프레드의 소개로 루소는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난다.

아폴리네르는 루소에게 자신의 애인인 마리 로랑생과의 커플 초상화를 주문했다.

루소는 정확을 기하기 위해 자를 들고 얼굴과 몸을 실측했다. 피부색도 똑같이 하고자 물감을 얼굴 옆에 대보며 신중을 기했다. 시인을 나타내는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아폴리네르와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그에게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전해주는 마리 로랑생.

“실물과 초상이 닮았는지에 사람들 의견이 일치했다. 전혀 안 닮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너무 신기했다. 초상화가 실물과 하나도 닮은 데가 없다면 사람들이 누구 초상화인지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게다가 제목도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라고 붙였다.”(아폴리네르)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 그림의 주인공들을 단박에 알아봤다. 이 그림이 못 마땅한 사람은 화가인 마리 로랑생뿐이다. 실물보다 뚱뚱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루소는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커다란 존재’를 표현한 것인데, 여자 맘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발상이다.

꿈과 현실, 초현실주의를 이끌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아틀리에인 ‘세탁선’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어울렸는데, 때마침 피카소가 우연히 단골 골동품가게에서 헐값에 팔고 있는 루소의 그림 ‘M 부인의 초상’을 산다. 매우 깊은 인상을 받은 피카소는 루소를 ‘세탁선’에 초대해 그를 위한 파티 ‘루소의 밤’을 열어준다. 피카소의 초대에 유명한 예술가들이 몰려왔다. 아폴리네르는 그 자리에서 루소에게 시를 헌정했고, 감동한 루소는 눈물을 흘렸다. 20대 피카소와 60대 루소의 운명적 만남. 이후 루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루소는 이 자리에 바이올린을 들고 와서 ‘클레망스’를 연주했다. 그리고 피카소에게 한 말이 유명하다.

“우리 둘 다 이 시대의 위대한 화가죠. 당신은 이집트 양식에서, 나는 현대적 양식에서.”

14세에 이탈리아 거장들과 실력을 나란히 했던 천재 화가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이란 작품을 탄생시키기까지 그가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들을 지우기 위해 애를 썼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관점을 세우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평면화하고, 여러 시점들을 한 화면에 구성하는 일. 바로 입체파가 추구하는 그 지점을 루소는 아무렇지 않게 이미 하고 있었다. 그러니 피카소가 놀랄 수밖에. 피카소는 자기 그림이 팔릴 때마다 루소의 그림을 샀다.

조각조각 그려서 붙인 것 같은 루소의 독특한 화법은 입체파의 콜라주에 영향을 줬고, 나아가 추상화의 길을 내줬다. 그리고 열대림을 주제로 한 꿈과 현실이 기묘하게 섞여있는 많은 작품들은 이후 초현실주의를 이끌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꿈’은 그의 모든 것이 농축돼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를 비난하던 비평가들조차 입을 다물게 만든 작품이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열정을 기울인 루소는 66세인 1910년에 봉와직염이 번져 목숨을 잃는다. 그의 장례식에는 일곱 명만 참석했다. 아폴리네르는 그의 묘비에 들어갈 기념사를 썼고, 1913년에 조각가 브랑쿠시와 오르티스 자라테가 비석에 새겼다.

[참고서적] 붓으로 꿈의 세계를 그린 화가, 앙리 루소(랜덤 하우스|안젤라 벤첼 지음|노성두 옮김)
              앙리 루소(마로니에 북스|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지음|이영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