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레토(Leto, Summer)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2019년 개봉

1981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한국의 1980년대 ‘땡전뉴스’처럼, 뉴스를 틀면 최고 지도자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고 심지어 로큰롤 공연장에서조차 환호를 지를 수 없는, 음악에 맞춰 고개만 까딱여도 제지를 당하던, 숨 막히던 권위주의의 시대. 사회주의 혁명을 겪은 노년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적국(미국) 물이 들었다며 욕을 해대지만, 더 이상 희망을 꿈꿀 수 없는 현실과 답답한 시대의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은 소련의 젊은이들은 록에 빠져든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레토’는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전, 러시아 최고의 록 스타 빅토르최의 데뷔 초창기를 모티브 삼아 1980년대 초반 레닌그라드, 불안한 시대와 조응하며 자유를 갈구한 청년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영화 제목인 ‘레토’는 러시아어로 여름.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청춘, 화양연화를 의미한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요절한 러시아 록의 전설 빅토르최가 나오지만 영화는 빅토르최 개인의 영웅담보다는 시대의 공기와 그 시대를 여름처럼 뜨겁게 살아낸 청년들의 초상에 초점을 맞춘다. 냉전시대의 끄트머리 미국과 경쟁하며 국가주의를 주입하던 소연방의 경직 그 자체인 프로파간다가 일상을 지배하지만, 이제 막 데뷔를 앞둔 밴드의 드러머는 아프간 침공을 위한 군대에 징집되지만, 숨 쉬기조차 버거운 현실에서도 청년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뜨거운 여름을 살아낸다.

그 여름의 한가운데 록이 있다. 먼저 시작한 마이크(로만 빌릭)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빅토르(유태오)는 서로 자극과 배움을 주고받으며, 서구의 록 음반 해적판을 듣고 필사하며, 상대방의 노래에 상대방의 연주를 서로 덧대며, 그들의 여름을 자신만의 록으로 불태운다.

토킹 헤즈, 이기 팝, 루 리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데이비드 보위, 비틀즈, 티렉스, 블론디 등 영화의 서사에 딱 들어맞게 등장하는 레전드 록 뮤지션의 이름과 대표곡들은 마이크와 빅토르의 여름이 비단 옛 소련뿐 아니라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존재했고 존재하는 시절임을 설득한다. 지금까지 예술, 그 중에서도 음악, 특히 록이라는 장르가 가진 에너지와 보편성을 이토록 선명하게 보여준 영화가 있었을까. 영화 ‘레토’는 흑백영화이지만 영화에 덧입힌 록음악과 청년들의 열정 때문인지 총천연색 컬러영화로 느껴진다.

뮤지션이 주인공인 영화인만큼 뮤직비디오와 뮤지컬영화 사이를 줄타기하는 연출도 흥미를 더한다. 어두운 시대가 배경임에도 영화는 재기발랄하다. 흑백영화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오는 컬러영상과 애니메이션이 삽입된 뮤직비디오, 스토리에서 벗어나 불쑥 등장하는 청년의 재치 넘치는 가이드는 이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다.

영화를 보며, 요즘은 잘 듣지 않았지만 내가 록음악을 좋아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레전드 뮤지션들의 대표곡이 나올 때는 벌떡 일어나 팔을 흔들며 소리 내어 따라 부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록음악이 왜 그렇게 매력적이었는지, 내가 왜 록음악을 좋아했는지, 록의 저항정신이 무엇인지 새삼 탄복하며 듣고 보는 영화 ‘레토’.

영화의 마지막 “우리가 모두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문구에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진다. 무거운 시대의 공기에 저항하며 불꽃을 피워냈던 뮤지션들에 대한 이토록 아름다운 감사와 존경의 인사가 있을까. 그들 덕에, 그들의 음악으로 우리는 뜨거운 여름을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레토’는 작년 5월 칸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지만,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푸틴 정권 치하의 러시아에서 수개월간 구금돼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의 록음악처럼 시대에 저항하는 뜨거운 여름을 살아내고 있었다. 영화의 엔딩 곡은 빅토르최의 ‘여름이 끝났다’이지만, 우리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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