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33
펜지켄트, 소그드인의 무역 거점도시

펜지켄트로 가는 길

펜지켄트 가는 길을 가득 메운 해바라기 꽃밭.

아침 10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국경을 넘어 타지키스탄 펜지켄트(Pendzhikent)로 갈 길이 멀기만 한데 벌써 기온은 섭씨 41도를 넘어서고 있다. 생수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운다. 그래도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에어컨 바람이 꿈인 듯 황홀하다. 사마르칸트에서 동쪽으로 타지키스탄 국경지대까지 한 시간가량을 꿈처럼 달린다.

펜지켄트는 타지키스탄 영토다. 이곳은 사마르칸트와 함께 소그드인이 활동한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다. 옛날부터 같은 문화권이 형성돼 서로 왕래하고 살았다. 그런데 스탈린 시대에 작위적으로 그은 국경선으로 갈라졌다. 타지키스탄은 민족 간 내전을 겪으며 중앙아시아 5개국 중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인가. 다른 나라 국경지대와는 달리 한산하기만 하다. 비교적 간단하게 통관 절차를 끝내고 펜지켄트로 향한다.

펜지켄트로 가는 길은 온통 노란색 해바라기로 가득하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해바라기 씨앗을 좋아해 어느 바자르를 가더라도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거나 이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각종 음식재료로도 사용하는데 이곳이 마치 해바라기 공급지처럼 느껴진다.

제랍샨강과 상인의 길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과 함께 소그드인의 중요 유적지인 펜지켄트.

타지키스탄은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과 그 줄기서 뻗어 나온 산맥이 국토의 93%를 차지하는 전형적 산악국가다. 산이 많으면 물도 많을 터, 연못 3000개와 강 930개가 있다고 한다. 이중 대표적 강이 제랍샨강이다. 소그드어로 ‘금이 많은 강’이란 뜻이다. 제랍샨강은 타지키스탄에서 발원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나보이를 거쳐 부하라에 이르고, 키질쿰사막으로 스며든다. 실크로드 무역을 번성시킨 소그드인들은 이 강을 따라서 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명 ‘소그디아나’라는 지명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소그드인은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꿀을 먹이고 손에 아교를 쥐어 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입으로는 항상 꿀처럼 감언을 말하고, 손에 돈이 들어오면 아교처럼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그드 문자를 배워 장사에 능하고 지극히 적은 이익도 다툰다. 남자가 스무 살이 되면 장사를 위해 가까운 이웃 나라로 여행을 보내는데 중국에도 찾아온다. 그들은 이익만 있으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처럼 소그드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인으로 키워졌다. 이들을 거치지 않고는 국제무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다. 소그드인은 제랍샨강을 따라 펜지켄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같은 오아시스 도시를 개척했다. 하지만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 증가에 따른 용수 공급의 어려움도 발생했다. 이에 소그드인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실크로드선상을 오가는 상인의 길을 개척했다. 이러한 상인의 길이야말로 소그드인이 나가야할 운명이고 삶이었다.

운명적 삶인 상인의 길은 항상 위험을 동반한다. 수 천 킬로미터를 오가는 동안 몇 개국의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사막의 불볕더위와 만년설산의 송곳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선 뇌물도 필요하고, 도적들에 대비해 무기도 다룰 줄 알아야한다. 소그드인들은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이윤은 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보상이자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소그드인의 도시 펜지켄트

실크로드 교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소그드인과 낙타상.

‘다섯 개의 마을’이라는 뜻의 펜지켄트는 제랍샨강 상류에 속한다. 해발 1000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함에도 열사의 태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소그드인의 애절한 역사가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인가.

5~6세기 초반, 소그드인들은 펜지켄트에 동서 실크로드 무역로를 연결하는 중요 도시를 건설한다. 그리고 6~7세기에는 더욱 번성해 한 국가의 존망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대했다. 이렇듯 번영을 누리던 펜지켄트는 8세기 아랍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다. 많은 소그드인들이 이슬람교 개종을 강압 받았고, 저항하는 자는 죽음을 모면할 수 없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했던가. 실크로드 역사를 주도한 소그드인의 도성지 펜지켄트 유적지는 중앙아시아의 폼페이가 돼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속에 창업도 수성도 나뒹군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열사(熱沙)의 사이를 파고들 때, 수성의 흐느낌이 들린다. 창업의 눈물이 구른다. 아! 영화(榮華)는 한 줌의 꿈인 것임을 열사는 오늘도 따갑게 가르쳐 주고 있구나.

1933년, 레닌그라드 동양학연구소에서 발굴을 시작한 펜지켄트는 현재까지 3분의 2가 발굴됐는데, 고대 소그드인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유적들이 많이 발굴됐다. 귀족들의 2층 저택과 평민들의 가옥, 신전과 회관, 시장은 물론 세관 등의 발굴로 당시 국제무역도시로서 펜지켄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펜지켄트 도성지 입구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다. 폭염을 피해 들어간 박물관은 한국의 시골집 창고와도 같은 어둑하고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이곳에는 각종 토기와 연장들이 전시돼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용을 무찌르는 벽화다. 그림 중에 상처 난 용의 몸에서 불꽃이 나오는 것이 흥미롭다.

타직인이란 명칭은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이란인 페르시아계 토착주민들이 투르크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부르기 시작했는데, 사악한 용을 무찌르는 이 벽화 역시 페르시아 전설 중 유명한 ‘루스탐 이야기’의 세 번째 관문을 형상화한 것이다. 700년이나 살았다는 루스탐은 페르시아에서 영웅 중 영웅이다. 당시 국왕인 쿠바드 왕을 악마에게서 구해내기 위해 위험한 칠난도의 길을 선택, 일곱 개의 관문을 모두 이겨내고 왕을 살려낸다.

소그드인의 도시 펜지켄트 저택에서 이처럼 루스탐 이야기의 벽화가 나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끝없는 지리적 개척으로 국제무역의 성공과 소그드인의 끝없는 번영을 소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펜지켄트를 가로지르는 제랍샨강.
펜지켄트 도성지에서 발굴된 루스탐 전설 벽화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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