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1919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해 일어난 3.1운동이 내년 100주년을 맞는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역시 100주년이 된다. 남북 분단과 이념 차이를 떠나 온 겨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기리고,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데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인천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중에 임갑득이라는 분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제82호(1920.6.5.)를 보면, 1919년 3월 25일 인천 만세운동의 주동자 15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2013년에 발간한 ‘인천광역시사’에는 1919년 3월 30일 인천시내 상가 철시운동을 독려하는 편지를 써서 배포한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결연한 의지를 가진 청년이나 장년의 모습이 떠오를지 모른다. 하지만 임갑득 지사는 1904년생으로 1919년에 불과 15세 소년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자료 중에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라는 게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체포되거나 감시당한 인물을 모아 놓은 것인데, 이 자료에 임갑득 지사 카드가 있고, 수형생활 중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도 있다.

여기에 따르면 임 지사는 1904년 8월 3일, 현재의 배다리 일대인 인천부 우각리(牛角里) 5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적과 출생지, 거주지가 모두 같다. 키가 5자 2치(5尺2寸)이니 대략 157cm 정도 된다. 체포 당시 직업은 여관조합의 급사라 했으니, 아마도 조합에서 심부름을 하며 생활했을 것이다.

임지사는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7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27일 형기를 시작해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가 1920년 2월 27일 가석방됐다. 무엇보다 인상적이랄까, 충격적인 것은 임 지사의 얼굴이다. 15세라는 나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똘똘하게 생긴, 아주 여리고 귀여운 중학생 모습이다. 수감 탓인지 머리를 깎아 더 그런 느낌을 준다.

어떤 연유와 각오로 임 지사가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석방 이후 행적도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15세 소년조차도 징역형에 처해야할 정도로 3.1운동의 열기는 뜨거웠다는 점이다.

임갑득 지사만이 아니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일반 범죄가 아니라 치안유지법ㆍ소요ㆍ 보안법 등 독립운동과 연관한 활동으로 체포된 분들 중 거주지가 현재 인천시에 속하는 분들을 가려보니 모두 98명에 이른다. 사회주의 운동가로 명성을 얻은 이승엽과 같은 거물급 인사부터 인천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를 주도해 1996년에 애족장을 받은 김명진 지사(1900~1965) 같은 분들, 또 이 카드 외에는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인사까지 다양하다. 나이도 다르고 체포ㆍ투옥된 시기도 다르다. 거주지 기준이니 인천 출생이거나, 본적이 인천이면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분들까지 망라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일부 창씨개명 사례가 있어 어쩌면 독립운동과 연관성이 적은 분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천이 기억해야할 분들임에 틀림없다. 올바로 조명하기 위해서라도 살펴봐야한다. 수형복을 입은 초췌한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그 분들의 얼굴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15세 소년 임갑득 지사의 여린 얼굴과 18세 청년 김명진 지사의 굳게 다문 입술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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