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인천청년광장 대표

2015년에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이 영화는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행복해질 수 없는 사회를 비판한다. 주인공이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 속 현실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사회라는 것을 ‘청년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이 다시 확인하게 한다.

지난 11일 김용균 씨가 사고를 당한 뒤, 사고 원인이 밝혀지고 그의 가방 속에서 컵라면이 나오자 2년 전 구의역 사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청년노동자 김 군의 죽음 이후에 ‘그래도 무언가 달라졌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고 원인이 현실에서 무용지물인 안전수칙, 그리고 원청의 책임 떠넘기기라는 사실은, 2년 전과 지금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번 사고 이전에 같은 현장에서 이미 1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한다.

어린 나이와 위험한 작업현장, 구의역 사고의 쌍둥이 사고라는 사실로 이번 사고가 사람들을 더욱 슬프고 분노하게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노동자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4년, 유럽연합은 회원국 28개의 직장 안전 통계를 발표했다. 그 통계를 보면, 2014년 산재 사고 사망자는 모두 3348명이었고, 이는 노동자 10만 명을 기준으로 할 때 2.3명이 사망한 수치다. 한국의 산재 사망자는 가장 최근 통계인 2016년을 기준으로 하면 2040명이었고, 이는 10만 명 당 11.1명으로 유럽연합의 다섯 배에 달한다. 한국에서 노동자 사망은 유럽연합보다 5배나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사망 사고가 아닌 산재를 당했다고 신청한 사람의 수치를 비교해보면, 한국의 산재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4분의 1수준이다. 산업현장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국이 유독 다른 나라에 비해 덜 위험한 산업현장에 노출돼있는 것이 아니라, 산재를 신청 못하게 사업주들이 막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 기사에서는 실제 산재 사고는 발표치의 23배나 더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이 10년도 더 지나서야 인정된 사례를 보면, 산재 사망 사고 또한 우리가 모르는 사고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럼, 왜 이렇게 한국은 산재 사고가 은폐되는 것일까. 그것은 원청의 사용자성이 모두 하청에 전가되기 때문이다. 위험한 작업은 모두 하청에 맡기고, 그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는 모두 하청책임으로 몬다.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의 동료로 일하던 노동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원청의 노동자였다면 벨트를 멈추고 일했을 것이다”라고. 하청의 노동자이기에 안정성보다 수익률을 우선한다. 그게 더 싸니까.

산재가 철저히 숨겨지는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청년노동자는 특히 더 위험에 노출돼있다. 숙련된 노동자들에 비해 사회에 갓 입문한 20대 노동자들은 어떤 일이 위험한지, 다른 현장에서는 이 일을 어떤 환경에서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번 사고와 구의역 사고뿐만 아니라,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들의 사망사고 뉴스를 우리는 기억한다.

청년실업률과 관련한 뉴스가 보도되면 항상 따라오는 말이 있다. ‘네가 더 노력하라.’ ‘눈높이를 낮춰라.’ 청년노동자들은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우리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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