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예순. 예순이라면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하며 수입이 필요하지만 복지 혜택은 그다지 없으므로 좋으나 싫으나 일정한 직업이 필요한 나이가 아닐까. 정년에 가까워 퇴직(당)하는 나이이지만 재취업을 하기에는 ‘정년에 가까운 나이라서’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나는 그들의 자식으로 예순 됨을 생각한다.

나는 결코 많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부족하다고도 할 수 없는 수입으로 살고 있다. ‘빠듯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때로 여윳돈이 생기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서 어떻게든 돼가고 있다.

나의 엄마는 정년 나이가 다 됐다. 각종 자격증을 따두었지만 재취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누리기 위한 정기 보험금 등의 납부 압박을 받는 듯하다. ‘그쯤이야’ 하고 그 돈을 대신 내고 싶지만 얼마 동안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기꺼이 ‘내가 내겠다’고 말하기가, 부끄럽게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 나는 공부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으며 공부하기 위해 공부와 인접하거나 무관한, 고용 조건이 불안정한 일을 한다. 이런 처지임에도(이런 처지는 도대체 어떤 처지인가?) 한 번은 유학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는 주제를 모르는가?

외국 자료를 능숙히 읽기 위해 어학 능력을 높이고 싶다는 필요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이것을 내게 부당한 욕망이라 말할 수 있나. 나는 이런 내가 무리한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리한 것은 정년에도 보장받지 못하는 생계비용이고 좁은 (재)취업시장이며 미래에 대한 걱정을 초래하는 현실이다.

부모와 내가 나눠가지는 서로에 대한 죄책감과 무관하게 엄마의 재취업이 성공적일지 장담할 수 없다. 엄마는 전에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정년이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내몰리다시피 퇴직을 당했다.(법적 정년은 만 60세라고 하지만….) 이후 비슷한 업종에서 일하려 했지만 ‘정년이 가까운 나이’라는 완곡한 거절을 경험 중이다. 그간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자격증을 따고 구직활동을 해왔지만 재취업은 쉽지 않아 보인다. 엄마는 노력하고 있다.

개인이 벌어들이는 소득 외, 국가가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이른바 범국민적 복지 혜택이 불가능해서 이른바 60세 이후에도 일해야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중장년층은 나이가 많고 업무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재취업에 자주 실패한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젊고 업무 이해도가 높은 청년의 경우는? 청년층은 경험과 실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취업에 고배를 마신다. 그런데 때로 중장년과 청년은 판촉 아르바이트 자리라는 작은 파이를 둘러싸고 경쟁하기도 한다.

즉,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눠가져야 하는 파이의 크기가 고정적이라는 것이다. 파이는 작은데 일을 시작하거나 일을 여전히 해야 하는 사람의 수는 늘어난다.

나는 당장 만 예순이 가까워진 나의 부모가, 60까지 살았을 때 내 앞에 들이닥칠 일이 걱정된다. ‘어떻게든’이라는 말로 속수무책 살고 싶지 않다. 최근에 엄마한테 ‘나는 내가 제일 걱정’이라고 말했다. 희망을 가지고 싶다. 내 엄마가 재취업된다면 나는 조금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순이라는 미래가 두렵지 않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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