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31. 테르메즈, 카라 테파와 파요즈 테파

테르메즈와 동서 문화의 융합

멀리서 바라본 카라 테파.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쉬켄트에서 약 730㎞ 떨어진 테르메즈는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최남단 도시다. 수르한다리야 주의 주도(州都)이기도 한 테르메즈는 25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로 동서 문화의 융합을 보여주는 흔적이 도처에 있다.

기원전 330년.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하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아우르는 박트리아 지역을 침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침공이 신들이 자신에게 맡긴 위대한 세계 정복 사업이라 했고, 당시 최강국인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대륙의 끝을 향한 동방 원정의 가속화를 꾀하던 때였다. 하지만 끝없는 정복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륙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함의 발로였을까. 바다와 가까운 인도 원정을 감행한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부하들의 반대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동서 문화 교류의 루트인 실크로드. 실크로드를 통해 헬레니즘의 전파에 두드러진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인들인데, 박트리아는 이들이 세운 국가다. 인도의 불교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은 이 왕국만의 독특한 유산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중앙아시아 오지에 남겨진 그리스 이주민들이 기원전 3세기 이룩한 이 고대 왕국은 서북 인도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기원전 1세기 멸망 때까지 동방에서 헬레니즘의 기수 역할을 했다.

그 후에 이 지방의 일부를 근거로 쿠샨 왕조가 일어났고, 불교를 숭상한 왕조 덕택으로 그리스 문화와 접촉을 이룬 간다라 불상이 제작됐는데, 이러한 점이 바로 동서 문화의 융합을 이룬 도시로서 기억되고 있다. 7세기 초, 이곳을 여행하며 ‘대당서역기’를 저술한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테르메즈의 풍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달밀국(테르메즈)은 동서로 600여 리, 남북으로 400여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고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으며, 승도들은 1000여 명에 이른다. 솔도파(부도: 유명한 승이 죽은 뒤 그 유골을 안치한 둥근 모양의 탑)와 불존상은 매우 신기하고 기이하며 영험하다.’

카라 테파와 군사훈련
 

파요즈 테파 발굴 현장 모습.

수도 타쉬켄트로부터 멀리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국경지대여서일까. 테르메즈는 한가롭다. 도로는 훤하고 사람들도 드물다. 이따금씩 미니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을 수줍은 얼굴로 쳐다본다. 하지만 수줍음도 잠시, 입가엔 웃음이 머문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진다.

인간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면 어디나 독특한 인간의 향기가 있기 마련인데, 웃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고운 향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오의 태양은 알렉산드로스가 동방기지의 전초로 요새화한 테파를 찾아가는 이방인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강렬한 열기로 지축을 달군다.

‘테파(tepa)’란 강을 끼고 들판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유적지를 말한다. 굳이 번역하면 ‘언덕’ 정도이다. 그러나 역사적 유적지로서 중요도와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해보면 ‘요새’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지리적 요충지에 세워진 방어와 종교적 기능을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지금도 중요한 테파들은 모두 군부대 안에 있어서 들어가 보려면 정부와 군부대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지리적 사고력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먼저 테레메즈의 북서쪽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라 테파를 찾았다. 이곳은 2세기에 건축된 불교 사원이 있는 요새다. 동굴 신전의 벽화는 웅장하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설법하는 부처의 모습이 있는 부조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흔치 않은 불교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자세하게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정작 테파는 보이지 않고 황량한 벌판을 막아선 철조망만 햇살에 번쩍인다. 게다가 군부대임을 알리는 표지와 함께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섰다. 테르메즈 시에서 받은 출입허가증을 보여줬지만 소용이 없다. 이유인즉, 테파 쪽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순간, 텔레반에 의해 파괴된 바미안 석굴이 떠올랐다. 설령, 그렇지는 않겠지만 세계적 문화유산이 널린 곳에서 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시대가 변해도 지형적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요새인 카라 테파. 그래서 더욱 동서 교류의 역사적 흔적이 산재해있을 터인데, 정작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우리의 속담처럼 내가 찾아온 날만 출입이 불가능했기를 믿어보지만, 출입허가증까지 가져온 발걸음은 못내 허허롭기만 하다.

파요즈 테파와 주르밀라 대탑
 

파요즈 테파서 발굴된 불상.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파요즈 테파에 도착했다. 가로 117m, 세로 34m 크기의 이 테파는 그 웅장한 크기만큼 훌륭한 건축물이 많은 곳이다. 과거 스님 1000여 명이 기거하며 불심을 키운 곳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에 걸맞게 이곳에서는 경전과 사리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됐는데 그 분량이 박물관을 지을 정도라고 한다.

파요즈 테파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곳은 스님들의 유골을 안치한 거대한 스루파(불탑)다. 주르밀라 대탑이라고 불리는 이 탑은 1000여 년의 풍상을 이겨냈는데 그 높이가 아직도 13m에 이른다. 초기의 높이는 약 30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에서 스루파는 ‘쌓아 올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흙으로만 30m에 이르는 거대한 탑을 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직 불심으로 가득한 자가 부처의 정수를 깨우친다는 일념으로 쌓아올린 장거(壯擧)가 아닐 수 없다.

켜켜이 쌓인 불심의 흔적 앞에 선다. 순간, 햇살은 여려지고 어디선가 달려온 바람이 귓불을 스친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대탑을 돌아 날아간다. 대탑은 어제처럼 우뚝 서서 말없이 광활한 대지를 관조하고 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찰라.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 뇌리를 스쳐간다.

‘아, 현장이 말한 영험함이란 바로 이것이구나!’
저 멀리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피어오른다.

테르메즈의 불교 번성을 상징하는 주르밀라 대탑.
부처와 보리수를 형상화한 간다라미술의 부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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