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그림의 말들 - 일리야 예비모비치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일리야 레핀, 1884~88, 러시아 트레티야코프미술관)

눈빛이 살아있는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들어온다. 흰 앞치마를 두른 하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이 남자의 어머니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엉거주춤 일어선다. 피아노를 치던 아내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바라본다. 이 와중에 아이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아빠를 알아 본 소년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역력하다. 소녀는 아빠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몸을 웅크리고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시선 한가운데 그가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해놓은 것 같은 이 그림은 일리야 예비모비치 레핀(1844-1930)이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이다. 유형지에서 돌아온 혁명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제목부터 뭔가 서사가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고, 잡혀간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몇 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돌아왔다. 예고 없이 돌아온 가장을 마주하는 가족의 놀람,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두려움, 반가움이 뒤엉켜있다. 돌아온 그의 표정과 눈빛은 굴하지 않는 당당함, 혁명가로서 신념이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레핀은 몸동작과 표정으로 심리를 묘사하는 데 달인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나면 웬만한 작품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세다.

스승 크람스코이와 ‘볼가강의 뱃사람들’

레핀은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에 ‘이콘’ 화가인 부나예프의 견습생이 된다. 이콘 화가는 교회에 색을 칠하고 형상을 그리는 화가를 말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예술이란 대중이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있어야하며, 예술가는 대중과 직접 대면해야한다.’

종교화와 초상화로 돈을 모은 그는 1863년 황립 예술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한다. 이듬해 황립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인 크람스코이를 만난다. “화가는 사회 현상의 비평가라네. 사회의 중요한 면들을 표현해야하지.” 크람스코이는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아카데미는 신화나 성서 이야기를 그릴 것을 요구했다. 레핀은 그들의 요구를 따르는 한편,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한 통찰이 담긴 그림들도 그렸다.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을 그려 콩쿠르에서 금메달 획득, 6년간 유럽을 여행할 수 있는 국비유학생이 됐다. 유학에 앞서 그는 화가로서 명성을 안긴 역사적 작품을 그린다.

햇살 좋은 어느 날, 레핀은 친구들과 배를 타러 네바강에 갔다. 화려한 별장들, 우아한 원피스를 입은 여인들, 단정한 제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로 낡은 옷을 입고 해안을 배회하는 뱃사람들을 본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옷감의 색을 구별할 수도 없는 썩은 옷을 입고 있다. 굵은 밧줄에 묶여있는 맨가슴은 태양에 그을려 갈색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강가와 대조적인 이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레핀은 진짜 뱃사람들을 찾아 볼가강으로 갔다.

2년 넘게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무거운 짐을 끄는 인간의 몸을 연구하며 스케치를 많이 했다. 그리고 마침내 등장인물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인물 하나하나를 관람객의 시선에서 놓치지 않는 대각선 구도로 그린 ‘볼가강의 뱃사람들’이 탄생했다.

“레핀의 ‘뱃사람’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놀라움이 엄습했다. 주제 자체도 충격적이다. 상층 계급이 민중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뱃사람을 주제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될까…다행히 그것은 기우였다. 뱃사람은 뱃사람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림 속 그 누구도 관람객을 향해 ‘이것 보시오, 나는 불행하오. 당신은 민중에게 빚을 지고 있소’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이것은 화가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에 충실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 배를 끌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관람객은 이들의 생명력에서 민중의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이러한 그의 그림들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를 솟구치게 만든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림 속 이야기만은 아닌 까닭에.

혁명을 테마로 한 그림들, 현실 표현에 매진
 

볼가강의 배를 끄는 사람들(일리야 레핀, 1870~73, 국립러시아박물관)

1873년 국비 유럽여행이 시작됐다. 그는 ‘볼가강의 뱃사람들’이 전시돼 큰 성공을 거둔 비엔나를 필두로 베니스와 로마를 거쳐 파리 몽마르트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파리는 인상주의가 한창 꽃을 피웠다. 레핀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파리에 마음을 빼앗긴다. 마네풍의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인상주의를 받아들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현하는 데도 즐거움을 느낀다. 그의 생각을 담은 편지를 받은 그의 스승 크람스코이는 우려를 표했다.

“이해할 수 없소. (중략) 당신에게는 예술에 관한 아주 강한 신념과 민중적 색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크라이나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거의 원시 기관과 같이 육중하고 강력한 것을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소.”(크람스코이의 편지 중)

“제 기억으로는, 제가 원시 기관만을 그리겠다고 맹세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아니요, 저는 제게 감동을 준 모든 것을 그리고 싶습니다.”(레핀의 답장 중)

레핀은 보다 넓은 주제를 다루고자했다. 그에게 주제의 연속성이나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옳은 것도 정당한 것도 좋다. 그러나 자신을 잃지 않는다. 나는 다양한 것을 좋아한다”라고 일축했다.

1876년, 아직 여행 유효기간이 남은 상태에서 그는 돌연 귀국한다. 파리 경험은 신선한 자극이 됐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화풍을 더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현 시대를 표현하는 그림에 재능을 쓰기로 맘먹는다. 전열을 가다듬은 그는 러시아를 휩쓸고 있는 변화의 물결 즉, 민중의 농노제 폐지 열망을 담은 ‘쿠르크스 지방의 십자가 행렬’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다.

그 이후 혁명가들을 표현한 ‘선동자의 체포’와 ‘고해를 거절하다’, 혁명의 테마 중 백미로 꼽히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와 같은 역작을 줄줄이 그린다. 레핀은 대상자의 심리 묘사로 관람자의 마음까지 흔든다.

그의 작품들이 ‘이동파 전시’에 합류하면서 이동파 전시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당시 아카데미 전시가 주류를 이룬 가운데 이동파 전시가 해성과 같이 나타났다. 아카데미 전시가 성서나 신화를 주제로 다뤘다면, 이동파 전시는 현실을 다뤘다. 아카데미 전시는 주로 대도시를 무대로 한 반면, 이동파 전시는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 도시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동파(wanderers)가 된 이유다. 1882년 레핀의 이동파 합류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마주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무소르크스키 초상화’…초상화의 대가이기도

무소르그스키 초상(일리야 레핀, 1881, 트레티야코프미술관)

레핀은 초상화의 대가이기도 하다. 톨스토이ㆍ이반 투르게네프 같은 문학가, 스타소프 같은 예술비평가, 왕벌의 비행을 만든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 ‘전람회의 그림’으로 유명한 작곡가 무소르크스키 등, 러시아 문화계를 이끈 이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그림 중 하나가 무소르크스키 초상화다.

무소르크스키는 독창적 재능으로 서유럽 사람들이 러시아 음악에 관심을 갖게 만든 음악가이다. 그런데 레핀이 그린 초상화의 모습은 뭔가 이상하다. 무소르크스키가 모든 걸 다 잃고 알코올중독에 빠져 군부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다. 그 친구였던 레핀은 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다. 그의 모습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큰 이유는 병실이 매우 좁았기 때문이다. 캔버스 바로 앞에 앉아있는 그를 그리다 보니 가깝게 느껴진다. 레핀은 4일 동안 그를 그렸고, 작업이 끝난지 이틀 만에 그는 사망한다.

헝클어진 머리, 지저분한 수염, 환자복 위에 걸친 가운, 술에 쩐 붉은 코, 광기서린 눈동자. 제도에 저항하다 몰락한 위대한 작곡가를 이보다 더 선연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레핀은 러시아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 초상화를 의뢰받는다. 러시아 화가로서 가장 명예로운 순간이다. 크기가 가로 9미터에 달하는 대작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1901년 5월 7일에 열린 국가의회’(1903)를 그린 후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된다. 거장으로서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레핀은 러시아를 떠나 핀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보내다 86세에 눈을 감는다. 레핀이 살았던 이 쿄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해 이름을 ‘레피노’로 바꿨다.

[참고 서적] 천개의 얼굴, 천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시네스트, 일리야 레핀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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