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영주(Young-ju)

차성덕 감독│2018년 개봉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졸지에 10대 가장이 된 영주(김향기). 자신은 생계를 위해 학업도 포기했지만, 동생 영인(탕준상)만큼은 대학도 보내고 번듯하게 키우고 싶은, 일찍 철들어버린 어른아이다.

언제나 씩씩하고 싹싹하게 살아가려는 영주지만, 영주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아직 미성년인 영주의 법적 대리인인 고모는 영주 남매가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하려하고, 설상가상으로 영인은 누나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에도 자꾸만 엇나간다. 영인이 또래들의 절도 사건에 휘말려 합의금을 물어줘야 할 상황에 처한 영주는 당황한 마음에 금융사기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생활비마저 날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영주의 선택은 자신의 부모를 죽게 만든 가해자 상문(유재명)의 집을 찾아가는 것. 그러나 막상 만난 상문과 그의 아내 향숙(김호정)은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복수를 꿈꿀 만큼 나쁜 이들이 아니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영주가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친절한 어른의 태도를 보인다. 영주는 그들에게서 부모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온기를 느낀다.

차성덕 감독의 ‘영주’는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영주의 처연한 성장담이다. 부모의 죽음도 감당할 수 없는 갑작스러움이었지만, 가해자 상문 부부에게 마음을 내어주게 된 것도 갑작스러운,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러움을 거치며 영주는 조금씩 어른이 된다.

2011년 인천여성영화제에서 단편영화 ‘사라진 밤’으로 차성덕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 ‘젊은 감독이 어떻게 이렇게 단단하고 묵직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고 그래서 질문도 했는데, 첫 장편 데뷔작 ‘영주’를 보니 이제야 알겠다. 감독은 영주처럼 어른아이였구나, 영주가 바로 차성덕 감독이었구나.

실제 차 감독은 10대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이 영화가 자전적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영주가 처한 가난한 10대의 현실과 가해와 피해의 단순한 구도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간사를 통과하며 조금씩 자라는 영주의 성장담은, 감독의 경험과 고민이 오랜 시간 숙성된 결과물일 것이다.

천애고아가 된 영주 남매를 대하는 어른들의 세상은 차갑기 그지없다. 오로지 남은 건 부모와 함께 살던 집뿐인데 친척들을 그 집을 팔아치우려 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영주가 영인의 보호자라고 찾아왔는데도 경찰이나 법원은 안정적 가계수입을 증명하라는 요구사항만 기계처럼 읊조릴 뿐이다. 급여통장이 없다고 하니 선이자부터 입금해야 대출해준다는 대출사기꾼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오로지 상문과 향숙만이 영주를 있는 그대로 품어준다. “영주야, 넌 좋은 아이야” “영주야, 괜찮아” 상문과 향숙을 만나고서야 열네 살에 가장이 돼 열아홉이 되기까지 다른 어른들로부터 들어본 적 없는 말들을 듣는다. 증오와 원망으로 찾아간 가해자의 집에서, 어쩌면 처절한 복수를 꿈꿨을 그곳에서 뜻밖의 온기를 선물 받은 영주. 그들에게 마음을 내주고 마는 영주를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부모를 죽인 원수라는 빤한 수사보다 더 절실했던 것은 외롭고 고단한 10대의 마음을 녹일 온기인 것을.

물론 영주는 다시 혼자가 돼 동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마음을 내어준 이들이 자신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 될 테니. 쉬운 해피엔딩을 선택하지 않은 영화지만, 어스름한 새벽녘 다리 위에서 울고 있는 영주가 애처롭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본다. “영주야, 괜찮아” “영주야, 넌 좋은 애야” 그 말이 영주가 끝내 내일을 살아내는 힘이 돼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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