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선미 인천여성회 회장

홍선미 인천여성회 회장

“스승과 제자를 뛰어넘는 사이니 괜찮다며 미성년인 저희를 길들였고, 사랑한다거나 결혼하자고 했다. 당한 아이들이 한 두 명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최근 인천의 한 교회 목사의 ‘그루밍 성폭력’을 폭로하며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 목사는 10대 여성 신도들을 상대로 지난 10년간 ‘그루밍 성폭력’을 저질렀고, 피해자가 최소 26명이나 더 있다고 한다.

그루밍이 성범죄라는 인식과 이를 처벌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범죄를 말한다. 피해자 고르기, 피해자가 필요한 것을 파악해 신뢰 얻기, 욕구 충족시키기, 고립시키기, 성적 관계 만들기, 통제하기 순으로 진행된다. ‘주변에 알리겠다’ 등의 협박과 회유로 성적 관계를 유지한다.

그루밍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피해자는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기도 해, 때로는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루밍 성폭력을 당하는 동안에도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것으로 믿거나 사랑이라고 여기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성폭력이란 것을 인지했을 때는 자신을 자책하고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비난하는데, 가장 힘든 건 위 피해자들처럼 ‘너희도 같이 사랑하지 않았느냐’라는 주변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루밍은 다양한 관계, 다양한 장소에서 발생하는데, 아동ㆍ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서 많이 발생한다. 의제강간죄(=강간과 동일하게 간주되는 성행위)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13세 미만으로, 피해자가 13세 이상이면 가해자를 처벌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 7월 외삼촌이 19세 조카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외삼촌은 연인관계를 주장했다. 재판부는 강간을 당한 피해자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무죄 판결했다. 지난해 11월에는 27세나 어린 여중생을 수차례 성폭행하고 임신시킨 혐의를 받은 연예기획사 대표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유는 강제성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피해자다움과 순결한 피해자’ 프레임을 요구하는 것은 성인지 감수성의 부재에 기인한다. 특히 그루밍 성범죄는 신뢰관계에서 발생하므로 피해자의 일상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성범죄라는 본질을 보지 않고 피해자의 현상만 보고 재단한다는 게 문제다.

채팅 앱을 통한 온라인 그루밍 피해도 극심해지고 있고, 성매매 유입 경로의 시작도 그루밍이다. 길들여 신뢰를 쌓고 통제하기까지 가해자의 폭력은 은폐되지만, 그루밍은 계획된 범죄이며, 가해자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가해자가 의도한 범죄행위에 빠진 피해자를 탓할 게 아니라, 범죄 사실을 놓고 판단해야한다.

그루밍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선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 조정해야한다. 선거 연령을 하향 조정해 청소년의 성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의 격차를 줄이는 것도 필요하다. 아울러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인식 개선과 처벌 규정 마련도 요구된다.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바꿔내는 것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그루밍 성범죄는 성차별적 인식과 성을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벌어지므로 성인지 감수성을 향상하기 위한 지속적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