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사이로는 시민기자들의 환경이야기를 격주로 싣습니다.

관급 공사 비중이 높은 실내건축 회사에 있어보니 나라 정책이 내 밥벌이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걸 느낀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학교 일이 많았다. 교육의 내실보다는 시설 투자에 선심을 쓴 탓일 게다. 이맘때가 되면 겨울방학을 앞둔 학교 공사 준비에 분주했다.

요샌 달라졌다. 내년 3월에 개원할 어린이집 인테리어 설계에 눈코 뜰 새가 없다. 무상보육 논란부터 어린이집 폭행 사건, 사립유치원 비리 문제까지, 최근 보육에 대해 부쩍 높아진 관심도가 더 안전하고 쾌적한 시설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진 덕분일 거다.

두어 달 전, 인테리어 디자인 계획을 잡느라 어린이집 원장을 만났다. 보육실 배치 같은 큰 주제는 잘 넘어갔는데 벽면을 어떻게 꾸밀지를 놓고서 의견이 쉽게 일치하지 못했다. 내가 제안한 방안은 도배였다. 당연했다. 안전하고 관리하기 쉬운 데다 저렴하기 때문에 어린이집 원장들이 가장 선호하는 벽 마감 재료 첫 순위가 벽지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생활공간은 쉽게 더러워지므로 몇 년마다 새로 도배하면 된다, 벽지만큼 저렴하고 재시공이 쉬운 재료가 없다고 설명하면 받아들일 줄 알았다.

이 분은 뜻밖에 페인트를 고집했다. 돈 많이 들여 하는 공사, 기왕이면 익숙한(그래서 세련되지 않다고 느껴지는) 도배보다는 깨끗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페인트가 낫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페인트만 칠하면 너무 밋밋하지 않겠느냐, 오염되기 쉬운 벽 아래쪽은 목재 널을 붙여서 멋도 내고 자연 분위기도 내보자고 다시 말씀드렸다. 이번엔 목재보다는 칼라유리가 훨씬 예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벽면 장식에 포인트를 주는 요소로 요새 상업 공간에서는 칼라유리도 많이 쓰이긴 하지만, 아이들 놀이공간에 유리를? 깨지는 사고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실마리가 안 풀리면 잠시 딴 길로 새는 것도 수가 될 터, 아이디어를 찾으려 건축 재료의 역사를 다룬 책을 뒤져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화학공업 발전으로 값싼 염료를 대량 생산하는 걸 당연시하는 지금이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원하는 색을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재료의 독성을 잘 모르던 시절이라 맹독성 중금속인 비소를 발라서 만든 푸른색 벽지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페인트 역시 19세기 말까지 부드러운 색감을 내는 데 납을 주로 사용했다.

페인트공이나 화가들은 대개 심한 납중독에 시달렸는데, 백연(白鉛)을 특히 애용한 미국인 화가 제임스 휘슬러는 납중독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페인트는 오래 보관하는 방법이 없어서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페인트공이 자기가 작업할 페인트를 직접 만들어 썼다. 당연히 그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이런 벽지와 페인트가 쓰인 침실은 이상하게도 빈대가 없었다. 하지만 지내다보면 비소 중독으로 인해 차차 몸이 아파왔다. 이 지경에 이르자 건강이 상하는 원인을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름만 되면 시골 요양지로 몸을 피하는 문화(=여름휴가)가 생겨났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값비싸고 해로운 재료였던 벽지와 페인트가 오늘날에는 제일 저렴하고 유해성도 거의 없는 마감재로 변신했다. 도배의 장점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고, 요새 나오는 친환경페인트는 중금속은커녕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아예 들어 있지 않은 대표적 친환경재료라 할 만하다. 하지만 둘을 비교해 뭐가 더 낫다고 말할 문제는 아니다.

주거공간이라면 따뜻한 느낌을 주는 벽지가, 상업이나 업무 공간이라면 좀 더 세련된 톤의 색상을 깨끗하게 낼 수 있는 페인트가 나을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 그 어린이집은 어떻게 했느냐면, 도배+페인트+친환경방염도료를 바른 자작나무 널판을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안전과 환경을 우선했고, 다행히 재정 여력도 있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 페인트와 벽지한테는 실례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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