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남이섬에 다녀왔다. 가을 색을 한껏 입은 나무들을 만났다. 길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 위로 쨍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강물도 조용히 반짝이며 흘렀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충만함이 밀려왔다. 너무 아름다워서였을까. 감탄스런 풍경에 탄성을 내뱉으면서도 자꾸 눈물이 났다. 영문도 모르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남이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곳곳에 은행 열매가 떨어져 있었다. 이토록 장성한 나무도 처음엔 단 하나의 씨앗이었다. 맨 처음 그 순간을 생각했다. 씨앗은 땅 속에서 온도와 습도, 낮과 밤의 길이를 예민하게 느끼며 적당한 시기를 기다린다. 때가 왔다고 느꼈을 때 조금씩 팽창해 솜털 같이 가느다란 뿌리를 만든다. 배젖의 압력에 못 이겨 단단한 껍질이 열리면 어둡고 차가운 땅속에 조심스럽게 첫 뿌리를 뻗는다. 그곳이 축복의 땅이든 척박한 대지든 한 번 뿌리를 내린 씨앗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 이제부터 씨앗이 가진 양분이 사라지기 전에 뿌리는 물과 적당한 양분이 있는 곳까지 길을 찾아야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 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씨앗의 운명을 건 여정이 시작하는 순간이다.

뿌리를 내려 터를 잡은 씨앗은 떡잎을 올리고 줄기를 틔워 잎을 만든다. 햇빛, 공기, 물로 당분을 만드는, 지구에서 유일한 공장인 엽록체를 잔뜩 실은 잎 말이다. 낮 동안 광합성으로 당을 만들고, 밤이 되면 호흡을 하며 당분이 녹은 수액을 뿌리로 옮긴다. 당분은 뿌리를 더 넓고 깊게 뻗는 데 사용되고, 뿌리에서 더 많은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새로운 잎사귀를 만든다. 해마다 봄과 여름 동안 나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해가 지날수록 나무의 키는 커지고 품은 넓어진다.

나무한테 가을은 열매가 익고 씨앗을 흩뿌리는 시기인 동시에 추위를 맞이할 채비도 해야 하는 중요한 계절이다. 특히 벚나무나 은행나무 같은 낙엽수들은 잎을 떨어뜨려야한다. 겨울 동안 뿌리에서 물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체의 수분을 보존해야만 한다. 증산작용을 하는 잎은 나무의 물을 없애는 일등공신. 그래서 나무는 줄기와 잎자루의 경계에 떨켜라는 얇은 세포층을 만든다. 이제 뿌리의 물은 떨켜를 넘어 잎으로 흘러가지 못한다. 낮이 짧아지면서 입에선 엽록소가 사라지고, 엽록소의 녹색에 가려졌던 카로틴과 크산토필이 각각 황적색과 노란색을 띠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떨켜에 막혀 이동하지 못하고 남은 당분은 안토시아닌으로 바뀌어 나뭇잎을 붉게 물들인다. 잎의 수분이 모두 빠지는 데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제 작은 바람에도 나뭇잎은 우수수 떨어진다.

나무는 여느 생명과 마찬가지로 세포들의 집합이다. 세포는 물로 가득 차 있고, 물은 얼면 부피가 커진다. 만일 영하의 추위에 물이 얼면 세포들이 터져 생명력을 잃고 만다. 하지만 가로수들은 영하 20도 가까운 강추위도 이겨낸다. 답은 역시 수분에 있다. 나무는 세포벽 밖으로 물을 내보내고 세포벽 안에 당과 지방산, 효소를 남겨 농축시킨다. 농도가 올라가면 온도가 내려가도 얼지 않는다. 세포 바깥도 문제없다. ‘세포들 사이의 공간은 세포에서 나온 고도로 정제된 물로 채워지는데, 이 물은 매우 순수한 상태여서 여기엔 얼음 결정의 핵이 돼서 자라게 하는, 혼자 떨어져 돌아다니는 원자가 하나도 없다. (중략) 핵이 될 만한 디딤돌이 전혀 없는 순수한 물은 영하 40도까지 ‘초냉각’ 해도 얼음이 없는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책 ‘랩 걸’ 중에서 / 호프 자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만 남긴 나무는 이제 바싹 마른 채 찬바람 앞에 당당히 선다. 땅 위의 앙상한 모습과 달리 땅 속 뿌리는 가장 높이 자란 가지보다 훨씬 깊고 멀리 뻗어 있다. 우리 머리로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살아온 세월만큼 굵어진 뿌리와 언제 물을 빨아들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된 잔뿌리들이 나무를 떠받친다. 수십 년간 매서운 겨울을 보내며 얻은 지혜가 뿌리마다 새겨져 있어 이제 두려울 것도 없다. 한바탕 긴 겨울잠을 자고 나면 새 봄이 올 테니까.

그날 남이섬에서 내 곁엔 곧 칠순을 눈앞에 둔 엄마가 있었다. 정장을 입은 엄마의 어깨가 유달리 굽어보였다. 다리는 더 가늘어진 것 같았다. 엄마의 몸도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걸까. 자연이 보여줄 수 있는 온갖 아름다운 색들로 물든 남이섬을 걸으며, 왜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가을이 오래오래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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