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27. 히바, 꼬흐나 아르크

키질쿰 사막과 낙타

키질쿰 사막에서 만난 낙타.

부하라에서 히바까지의 거리는 약 500km이다. 그 사이에는 터키어로 ‘붉은 모래’라는 거대한 키질쿰 사막이 자리 잡고 있다. 히바는 이 사막에 가로 막혀 오랫동안 독립된 오아시스 도시로 발전했다.

키질쿰 사막은 금빛 반짝이는 모래산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갈 섞인 모래밭이 지평선 끝까지 닿아있고, 사막의 풀인 삭사울이 드넓은 황무지를 메우고 있다.

하지만 평지인 까닭에 모래바람은 더욱 거세다. 도로 위를 사정없이 휩쓸고 지나가는 모래바람은 자동차조차도 나아가기 힘들다. 하늘도 가릴 듯한 모래폭풍이 아무다리야를 뽀얗게 에워싼다. 신에게 기원하지 않을 자 누구이런가. 실크로드를 오간 대상(隊商)들이 하나같이 신심이 두터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낙타는 죽음의 땅인 사막을 헤쳐갈 수 있는 수단이다. 낙타 한 마리가 400kg 이상의 짐을 적재하고 물이나 식량 보급 없이 400km를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하매 낙타에 대한 고마움은 오늘날까지 구전가요로 전해진다.

머나먼 길 걸어
끝없는 사막과 자갈길을 나아간다.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아득한 길 걸어가는 우리들
여기서 물건을 팔고, 저기서 물건을 사고,
모두에게 나눠준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태양의 도시’ 히바의 기원이 된 우물

히바의 기원을 알려주는 꼬흐나 아르크의 우물.

아무다리야 하류의 오아시스 지역은 고대 호레즘의 영토였다. 지금의 카라칼팍 자치공화국, 우즈베키스탄의 호레즘주(州), 투르크메니스탄의 타샤우스주(州)가 고대 호레즘 영토에 해당한다. 농경 오아시스 주변에는 목축을 하는 유목민족이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는 언어ㆍ종교ㆍ문화ㆍ인종적 발생이 비슷했다. 그들은 함께 친척관계를 형성하며 더불어 살았고, 함께 강물을 사용했다. 외부의 적에는 힘을 합쳐 대항해나가면서 중앙아시아의 문화를 일궜다. 이를 호레즘 문명이라 하고, 그리스와 잉카에 이어 세계 7대 문명에 포함된다. 호레즘 문명은 실크로드 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줬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고대 호레즘이었던 히바는 ‘태양의 도시’라고 부른다.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여있어 복사열이 강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 일 텐데, 그래서인지 햇살이 더욱 뜨겁다. 그러나 이처럼 뜨거운 도시에도 기원전 2000년부터 농경민이 정착했다. 도시를 흐르는 강인 아무다리야가 사막을 적셔줬기 때문이다. 사막과 강 사이에 주거를 정하고 관개농업과 가축을 사육하며 농경문화를 발달시킨 이들은 수세기 동안 실크로드의 주인공으로 행사했다. 서쪽에서 카라쿰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도, 동쪽에서 키질쿰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도 모두 히바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고단한 여정을 쉬어갔기 때문이다.

히바지역도 원래 사막이었단다. 페르시아 대상들이 히바의 사막을 지나다가 잠깐 쉬었다. 그때 꿈속에서 불똥이 날아들었다. 이를 길조로 여긴 히바 사람들은 불똥이 떨어진 자리를 파 보았다. 그러자 물이 솟아났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히바는 대상들의 숙소가 됐다. 사람들은 이 우물물을 신이 선물한 ‘신성한 물’로 여기고 신에게 감사했다.

이처럼 히바가 대상들에게 사랑받게 된 것은 우물에서 나오는 시원하며 깨끗한 물맛 때문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열사(熱沙)의 미로를 빠져나온 대상들은 생명수를 주신 신에게 “헤이 바르흐!(신성한 물)”라고 감사와 찬양의 목청을 외쳤다. 그때부터 주민들은 이 지역을 ‘히바르’로 불렀고, 오늘날 히바란 명칭의 기원이 됐다.

히바의 기원이 된 우물은 꼬흐나 아르크(궁궐)에 있다. 우물은 아르크 한 편에 있었는데 마치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아르크를 지은 것처럼 보인다. 깊지 않은 우물임에도 수량이 풍부하다. 우리의 계곡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 맛도 좋다. 갈증을 풀기 위해 얼마를 마셨던가. 뜨거운 열기의 햇살이 오히려 반갑다.

절대 권력도 시원한 물 한 모금만 못하다

꼬흐나 아르크의 조폐국 전시실에 진열된 비단천 화폐.

히바가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때는 10세기께로, 당시 유명한 학자인 알 이스타흐리는 히바를 ‘당대 최대 도시 서른 곳 중 하나’라고 했다. 호레즘 지역의 무수히 많은 도시 중에서 히바는 사막 위에 건설된 튼튼한 요새였다. 그러나 유목문화와 다름없는 농경문화를 유지해서인지 문자와 기록에는 신경 쓰지 않아 호레즘 문명의 생생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에 힘입어 과거 정치적ㆍ문화적 발전 정도를 입증하는 유물이 발견됐을 뿐이다.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으로 요약했다.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을 받은 문명이 그렇지 않은 문명보다 오래도록 발전해오고 있다는 것인데, 호레즘 문명의 기초를 닦은 히바 역시 사막이라는 자연재해와 함께 칭기즈칸의 몽골군과 티무르제국에 병합되는 등 동서 문명의 충돌지로서 지정학적 위치를 견뎌냈다.

궁궐에는 우물뿐 아니라 여러 시설이 있다. 칸의 숙소, 재판소, 병기고, 조폐국, 접견실, 하렘(=여성 전용 방)과 외양간 등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조폐국이다. 이곳에서 비단이나 목화천으로 화폐를 만들었다.

법원에서는 칸이 직접 죄인들을 다스리고 서민들의 억울함을 달래줬는데, 법원 출입구가 달랐다. 들어오는 문은 본인이 정할 수 있었다. 나가는 문은 칸이 결정하고 처벌 정도에 따라 나가는 문을 다르게 했다. 하렘은 여성들만의 방인데 모든 궁궐이 그렇듯이 칸을 위한 별도의 통로가 있다.

궁궐은 ‘도시 속의 도시’를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18세기 말까지 1세기 동안 지어졌다. 하지만 영화를 누릴 새 없이 왕국은 무너졌으니, 모든 것은 시작한 곳에서 끝이 나는가. 인간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하지만, 역사는 인간을 소모품으로 생각한다. 히바 시작의 역사가 시작된 곳에서 쓸쓸히 무너지고 있는 궁전. 절대 권력도 시원한 물 한 모금만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크 성 유적.

 

흐나 아르크에서 본 이찬칼라.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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