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진 시민기자의 사소한 과학이야기 172. 과일과 진화
심혜진 시민기자의 사소한 과학이야기 172. 과일과 진화
  • 심혜진 시민기자
  • 승인 2018.09.1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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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지키려 노력해온 작은 약속이 하나 있다. 날마다 과일을 한 알씩 먹겠다는 것이다. 이 다짐이 가장 깨지기 쉬운 계절은 참 모순적이게도 과일이 넘쳐나는 여름이다. 여름철 과일은 무르고 상하기 쉬워 보관이 어렵다. 복숭아 일곱 개를 일주일이 아닌 3일 안에 해치워야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주, 신경을 써서, 신선한 과일을 사야만 약속을 무난히 이어갈 수 있다.

그러다 9월이 되면 마음이 느긋해진다. 이제 내년 늦봄까진 별 걱정 없이 과일을 먹을 수 있다. 사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과는 저렴한 데다 장기간 보관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넉넉히 주문해 냉장고 과일 칸에 넣어두면 한 달 아니 두 달도 끄떡없다.

과일을 먹으려는 이유는 건강 때문이다. 몸 상한 후 보약을 먹기보다는 미리 소소하게 잘 챙겨먹자는 게 내 생활신조다. 과일은 영양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맛도 좋고, 종류도 다양하고, 빵이나 다른 먹거리와 잘 어울린다. 가장 좋은 건 별다른 조리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씻고 대충 썰면 끝. 과일을 먹은 날과 안 먹은 날, 활력이나 피곤함, 몸 속 가벼움 등 나만 느낄 수 있는 차이가 꽤 크다.

최근엔 과일이 인간 뇌의 진화를 이끌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지난해 과학저널 <네이처 생태와 진화>에 뉴욕 대학 생물심리학 연구팀의 논문이 실렸다.

연구팀은 원숭이, 침팬지, 인간 등 영장류 140종을 대상으로 식생활과 뇌 크기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나뭇잎을 먹는 영장류보다 과일을 먹는 영장류의 뇌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나뭇잎은 두껍고 단단한 세포벽 안에 영양성분이 들어 있어 이를 소화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반면 과일은 소화가 쉽고 당분이 많아 열량도 높다. 이 열량을 뇌가 사용하게 돼 크기가 커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에 비해 크기가 크고 소모하는 에너지가 상당히 많다. 그 이유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다. 우선 집단으로 모여 사회생활을 하면서 뇌가 커졌다는 ‘사회적 지능’ 가설이다. 다른 이와 협동하고 의사소통하려는 노력이 뇌의 크기를 키웠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화적 지능’ 가설은 축적된 문화적 지식을 다른 이에게 배우거나 다른 이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뇌가 커졌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생태학적 지능’ 가설은 먹이를 찾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뇌가 발달했다는 내용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먹이가 있을 만한 장소를 찾고, 기억하고 판단하려면 높은 수준의 탐색 능력이 필요하다. 언제 어디에서 잘 익은 과일을 찾을 수 있을지, 나무 높이 매달려 있는 열매를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인 열매의 과육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지, 어떤 도구를 사용해야할지, 우리 조상들은 복잡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뇌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지난 5월 <네이처>에는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대 연구팀은 60%의 생태적 도전, 30%의 협동적 도전, 10%의 그룹 간 경쟁 도전에 직면했을 때 성인 호모 사피엔스 크기의 뇌와 신체로 진화한다고 예측했다. 협동도 경쟁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도전에 비해 진화에 한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는 유독 이 문장이 과학 실험 결과라기보다는 한 편의 잠언처럼 읽혔다. 그저 내 존재의 생명력을 믿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다 보면 더 나은 나를 만나게 될 거란 말처럼 들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엔 특별히, 사과를 꼭꼭 씹어 먹으며 나의 ‘살아감’과 ‘살아냄’을 응원했다. 사과 한 알이 준 선물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