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보화
번역가
7년 전 서울의 한 문화센터에서 책을 기획하고 번역하는 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께서 유독 강조한 것은 그저 번역의 기술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여럿이 힘을 모아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주는 공동작업 방식을 권유하셨다.

나로서는 번역이 책상머리에 앉아 혼자 오롯이 해내는 작업이라 생각했기에 선생님의 말씀이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 때는 그랬다. 혼자였고,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고, 늘 마음이 허전했다. 사실 지금보다 어렸던 그 때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 내가 속한 환경, 조건들에서 그저 벗어나고 싶었고 떠나고 싶었더랬다.

뒤돌아보니 부평에 몸담고 산지 올해로 18년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결혼한 언니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국철을 타고 서울로 통학했다. 중간에 2년쯤 타지에 산적도 있었지만, 내 젊음의 시간을 오롯이 부평에서 거주했다. 그런데 거주만 했을 뿐 내 마음은 부평에 있지 않았다. 학교에 가기 위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 나는 늘 혼잡한 국철을 타고 서울에 가야만 했다.

막차시간을 맞추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를 때면 집이 서울인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가끔은 1호선 인생이 지긋지긋하다고 속으로 되 내였다. 몇 년을 살면서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동네에 누가 들고 나는지 알지 못했다. 워낙 주변머리가 없는 성격 탓도 있지만, ‘도시의 삶이 다 그렇지 뭐 뾰족한 수가 있나?’ 그랬다. 그 때의 나는 부평을 언제든 뜰 수 있는 뜨내기였을 게다.

그러한 내 삶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공동육아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면서였다.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외롭다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무엇보다 육아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몫이 아니었다. 서로 돕고 더불어 같이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결국 공동육아를 지향하는 어린이집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와보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마을공동체 같은 것이 형성돼있었다. 이곳에 와서 이웃과 일상적 삶을 같이 나누고 관계를 맺으면서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고 든든하게 하는지 깨달았다. 아이들 또한 친구뿐 아니라 여러 이모 삼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실제 생활에서 부딪히며 배우는 게 많아 보였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외쳐대는 이 사회에서 옆 사람을 경쟁의 상대가 아닌 협력자로 바라보고, 서로 나누고 배려하고 돌보는 삶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공동육아의 가장 큰 의미다. 그것은 배움이 일상적 삶과 분리되지 않은 교육이며, 마을 자체가 배움터이고 어른과 아이가 하나의 공동체로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같이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다시 마을이다’라는 조한혜정의 책에 나오는 “근대는 ‘마을을 버린 사람들’에서 시작해서 ‘마을을 만드는 사람들’로 끝이 날 것이다”라는 말은 경제 성장, 도시화, 산업화로 파괴된 마을공동체의 복원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모여 살아야하고 힘을 모아야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존 대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같이 가난하다면 버텨볼 재간이 있겠지만, 각자가 제방에서 홀로 가난하다면 어떨까. 주변에 내 어려움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혼자 먹는 밥은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맛이 없다. 무얼 먹어도 여럿이 즐겁게 나누어 먹어야 맛이 나는 법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그 흔한 옛말이 얼마나 소중한 삶의 가치인지 새록새록 느끼는 요즘이다. 마지막으로 여러 해 동안 못되게 굴었던 나를 묵묵히 받아준 부평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앞으로 부평을 위해 무언가 돌려주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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