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24. 부하라, 실크로드의 종교도시

실크로드 카라반의 종교적 안식처

중앙아시아의 고도(古都) 부하라 전경.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길. 이글거리는 태양은 정신까지도 메마르게 하고, 천지를 개벽하는 양 사나운 모래폭풍은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오직 유일한 희망은 물과 휴식처. 실크로드의 카라반들(=낙타나 말 등에 짐을 싣고 떼 지어 다니면서 특산물을 팔고 사는 상인 집단)은 수없이 생을 걸고 사막을 오갔다. 그때마다 생명수가 흐르는 오아시스가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등대인 미나레트(첨탑)는 그들의 신앙이 됐다. 오아시스 도시인 부하라는 바로 사막에서 심신이 지친 카라반들의 낙원이었다.

생명에 대한 감사함과 경외감은 종교를 부흥시켰다. 이슬람교 이전에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등에 신심이 가득한 카라반들은 저마다의 종교를 부하라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특유의 오아시스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하기에 종교도시인 부하라는 사마르칸트만큼이나 매혹적인 실크로드 도시다. 2500년 전부터 도시문명이 발달한 부하라는 최근에 시 외곽의 유적지를 근거로 그 역사를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려한다. 세계 문명 발상지를 현재 4개에서 7개로 잡는다면 부하라와 호레즘을 일컫는 ‘트랜스 옥시아나(아무다리야 하류 삼각주)’도 그중 하나가 된다고 하니, 과연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고도(古都)라고 하겠다.

도시의 번성과 몰락, 그리고 부활

라비하우즈의 뽕나무.

인구 25만명의 부하라는 제럅산강 하류의 퇴적층에 사원을 중심으로 세워진 도시다. 오늘날도 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부하라는 도시가 터를 잡은 이후로 한 번도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지하 20미터 깊이에서는 주거지와 공공건물, 성채의 잔해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도시 전체가 고대 유적인 셈이다.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수도원’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부터 실크로드와 밀접하게 연결된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부하라는 천산산맥을 넘어오는 실크로드 북로와 파미르고원을 넘어오는 실크로드 남로가 만나는 지점이자, 키질쿰과 카라쿰 사막을 지나 페르시아와 카스피해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이 때문에 모든 실크로드 교역자들은 부하라에서 여독을 풀고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그리고 각자의 믿음 앞에서 경건하게 번영과 축복을 빌었다. 부하라가 실크로드의 중심도시이자 종교도시가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나라 승려인 현장도 이곳을 방문했다. 그가 본 부하라는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짧은 1700리의 장엄한 나라였다. 당시 안국(安國)으로 알려진 부하라는 안록산의 고향이기도 하다. 안록산은 고선지와 함께 당나라의 번장이 돼 한참 나이어린 양귀비를 어머니라 부르며 권력에 아부했던 자다. 그가 난을 일으키자 번성하던 제국은 일거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실크로드의 영웅인 고선지마저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역사상 부하라를 최초로 수도로 정한 나라는 9세기의 사만왕조였으나, 이후 부하라는 터키계인 카라한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터키문명을 흡수한다. 하지만 13세기 초, 칭기즈 칸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고 도시는 종말을 맞이했다.

부하라가 다시 부활한 것은 14세기 티무르시대였다. 티무르의 정열과 신앙심이 현재의 이슬람도시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부하라의 전성 시기는 어떠했을까. 모스크 360개와 메드레세 167개가 도시를 채웠고, 이슬람세계 각지서 올라온 2만여명의 학생들이 부하라의 메드레세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유학생들로 번성한 부하라는 종교적 자긍심이 높은 도시였다. 도로를 순찰하던 경찰이 아무나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코란의 내용이나 율법을 물어 이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매길 정도였다. 중앙아시아 최고의 이슬람 성지라는 자긍심 뒤에는 부하라에서 교역하며 살아가기도 쉽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찻집과 기념품 가게만이

부하라의 상징인 아르크성.

어디를 가도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부하라는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답게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오후의 햇볕이 각기 다른 그림자로 중세의 향기를 불러일으킬 즈음, ‘라비 하우즈’에 도착했다. 타직어로 ‘연못 주변’이란 뜻인데, 오아시스 도시의 필수 요소인 연못을 중심으로 종교적 안식처인 메드레세(=고등교육시설) 2개와 카라반들의 숙소인 호나코가 있다.

1620년에 완성된 이 연못 물은 식수로도 사용됐다. 지금은 오염된 채 오리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부하라 칸국 시절만 해도 이런 연못이 50개나 됐는데, 현재는 3개밖에 없으니 그만큼 수량이 말라버린 것일까. 뜨거운 날씨와 카라반들의 이동으로 인해 빈번하게 말라리아가 발생하고 평균수명까지 낮아지자 폐쇄했다고 한다. 귀한 물일수록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재앙으로 온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화다.

라비 하우즈 옆에는 수령 600년 된 뽕나무가 있다. 이곳에 뽕나무를 심은 사람은 누구일까. 중국과 페르시아를 왕래하며 비단 무역을 하던 카라반 일행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거래하는 일들이 언제나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신성한 마음에서 비롯한 행위가 수백 년이 지난 현재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일체감을 이루고 있으니, 부하라는 정녕 종교의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라비 하우즈 뒤에 위치한 메드레세들은 한 때 무슬림 양성을 위한 배움터였지만 지금은 찻집과 기념품 가게로 변했다. ‘사람들은 두루 친분을 나눠야한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행해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메드레세의 글귀가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건만 열정의 배움터엔 따가운 먼지만 날리고, 수공예품과 카펫을 만드는 지친 손들만 식어가는 석양을 마주하고 있다.

카라반 숙소였던 호나코.
수공예 공방점으로 변한 메드레세.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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