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평론] 화두

화두|최인훈 지음|문이재 출판|2002.

당시에는 읽다 말았다. 바쁜 일도 있었거니와, 일종의 사상사적, 정치적 요설에 질린 면도 있었다. 소설이란 모름지기 그 어떤 경계에 있어야하는 법이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되, 그것이 등장인물에 육화해 드러나야 한다. 아니면, 사유의 힘은 철학서에 못 미칠 테고 소설이 주는 장점, 그러니까 극적 긴장과 재미 따위도 놓치기 쉽다. 뱁새가 황새 쫓는다는 자괴감보다 어설픈 문학개론적 핑계를 대며 책을 덮었다.

그러다 부음을 들었다. 문득, 다른 것보다 읽다말았던 그 작품을 다시 읽는 것이 한 독자로서 그 분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서재를 뒤지니 두 판본이 나왔다. 읽다만 민음사에서 나온 1994년의 초판본과 나중에 헌책방에서 구한 2002년에 나온 문이재 출판이었다.

새삼 느꼈지만 나온 지 꽤 지난 작품이었다. ‘화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기왕에 나온 최인훈 전집에 2008년 포함됐다. 그러니까 ‘화두’는 세 가지 판본이 있는 셈이다.

독자로서 의무감으로 읽으니 괴로웠겠다고는 하지 말기를. 이번에는 아예 단단히 마음먹고 읽은지라,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작가의 문체는 나와 여전히 잘 맞지 않았다. 대체로 60년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문체가 주었던 정서적으로 일치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여전했다. 글쓰기를 일본어로 배운 세대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비극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책은 더디게 읽혔고, 재미는 떨어졌다. 그럼에도 자전적 소설이 주는 감동은 충분히 만끽했다. ‘광장’의 최인훈의 문학적 시원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리고 그가 어떤 변주를 했더라도 일관되게 지켜나갔던 세계관은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청소년 시절, 그의 영혼을 휘어잡은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중학교 시절에 겪은 일. 공화국을 찬양하고 미제를 탄핵하는 벽보에 쓴 글의 한 구절이 문제가 됐다. 학교 운동장에 바윗덩어리가 널려 있었다고 썼다. 요지는 그럼에도 내가 다니는 학교이니 사랑하겠노라는 것이었다. 지도원 선생님은 자아비판회에 그를 세워 추궁했다. “온 인민이 참가하는 거대한 역사적 위업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자랑스러움이 없는 사상적 태만에서 나온 반동적 생활 작풍”이라고 몰아세웠다.

이데올로기는 어린 영혼에 감시와 처벌의 상징으로 꽈리를 틀었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숙제로 조명희의 ‘낙동강’에 대한 독후감을 내라 했다. 여학생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를 찾는 내용으로 썼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숙제 뭉치에서 그의 글을 꺼내서는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 작문은 작문의 수준을 넘어섰으며 이것은 이미 유망한 신진 소설가의 소설”이라고 선언하셨다. 그의 영혼에 불도장이 찍힌 셈이다. 작가의 삶을 살아야하는 소명이 주어진 순간이었다.

장남에게 주어진 가족의 기대를 어기고 작가가 되는 삶을 그렸고, 소설적 양식에 대한 회의감에 연극에 매달리는 모습도 나온다. 미국에서 겪은 변방 지식인이 느낄만한 자괴감도 잘 드러났고, 몰락한 소련에 가서 한 세기를 장악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감회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문학적 뿌리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비극성의 연원으로 넓고 깊게, 그리고 집요하게 퍼져있었다. 공인된 답변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던진 질문에 끊임없이 답변하고 회의했다. 내가 감동한 바는 그의 일생이 어쩌면 ‘유형지에서 자기에게 내려진 판결의 정당성’을 찾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가족사적 불행에 섣불리 눈이 멀어 원망하고 저주하는 문학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세계사적 상황에서 살펴보고,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이었다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열린 의식을 보여준다. 놀라웠다. 자기를 부정해서라도 참된 것을 찾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말이다.

흔히 4.19가 있었기에 ‘광장’이 가능했고, 소련 붕괴가 있었기에 ‘화두’가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대해야한다. 종전 선언이 준비되는 대전환기에 어떤 위대한 소설이 나올 것인가, 라고. 아쉽게도 최인훈은 영원히 붓을 놓았지만, 누군가가 그 위업을 물려받기를 소망해본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