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의 작품들

내 생일|마르크 샤갈|1915|뉴욕현대미술관

헬륨가스가 가득 찬 인형처럼 공중으로 붕 떠오른다. “하늘에 구름이 솜사탕이 아닐까. 어디 한번 뛰어올라 볼까”라고 노래하는 ‘그녀를 만나는 곳 백미터 전’처럼 말이다. 이 그림은 사랑에 빠진 샤갈이 자신의 생일날 그의 사랑 벨라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장면을 그린 것이다.

방으로 뛰어 들어오는 벨라도, 그녀를 맞이하는 샤갈도 사랑의 기쁨을 어찌하지 못하고 공중에 날아올라 입맞춤한다. 정열의 레드 카펫 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벨라와 대조적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샤갈. 그가 더 꿈길을 걷고 있는 중임을 표현한 거 같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조차 둘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하고 차분하다.

1909년, 스물두 살의 샤갈은 여자 친구 테아의 집에 놀러갔다가 그녀의 친구 벨라(14)를 처음 만났다. 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진짜로 눈에 불꽃이 튄 건 테아일 지 모른다. 눈앞에서 친구에게 애인을 뺏긴 셈이니.

샤갈은 벨라를 처음 만난 날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벨라가 내 과거, 현재, 미래까지 언제나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 처음 만났던 순간, 그녀는 나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꿰뚫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중략) 내가 나의 창문을 열기만 하면, 벨라가 푸른 공기, 사랑, 꽃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벨라는 순백의 혹은 검정색의 옷을 입은 채 오랫동안 캔버스 위를 떠다니며 나의 예술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샤갈의 자서전 ‘나의 인생’ 중)

벨라는 부유한 보석상의 막내딸이다. 러시아 여성 3%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모스크바 게리에르여자대학교를 입학한 수재였다. 그녀는 배우의 꿈을 접고 스무살에 스물여덟의 샤걀과 결혼한다.

러시아의 유대인 마을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난 샤갈은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채소를 파는 어머니 사이 9남매의 장남으로 어렵게 자랐다. 어린 시절 본명은 모이쉬 자카로비치 샤갈로프.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 덕분에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파리로 간 샤갈은 러시아출신 유대인 예술가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프랑스식 이름인 ‘마르크 샤갈’로 개명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연인들|마르크 샤갈|1937|국립이스라엘미술관

1910년, 후원자를 만난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리며 모딜리아니ㆍ레제ㆍ아키펜코를 만났고, ‘미라보 다리’를 쓴 기욤 아폴리네르와도 교류한다. 샤갈은 예술의 변방 러시아와 비교 불가한 파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태양은 파리에서만 빛나고 있었다” 샤갈은 1914년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이후 샤갈은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1차 세계대전 발발로 파리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듬해 벨라와 결혼하고 딸 이다를 낳는다. 은유로 가득 차있는 샤갈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사용한 소재들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생 외국을 떠돈 샤갈은 그의 고향을 배경으로 연인, 염소ㆍ소ㆍ닭과 같은 가축, 바이올린과 꽃을 주로 그렸다. 가축들은 종교적 의미도 함축돼있다. 당시 러시아의 유대교는 ‘하시디즘’이라는 분파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사후에 영혼이 닭ㆍ염소ㆍ말 등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또한 소는 러시아 대륙을, 바이올린은 유대교를 상징한다. 특히 바이올린은 그가 자주 연주했던 악기다. 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내 생일’에 등장한 작은 꽃다발은 해를 거듭할수록 벨라를 향해 커져만 가는 사랑처럼 커지고 다채로워진다.

“나는 환상과 상징이란 말을 싫어한다. 우리의 모든 정신세계는 곧 현실이다. 그것은 아마 겉으로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진실할 것이다” 환상과 상징은 장치일 뿐, 그것으로 그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현실임을 그는 주장했다.

그가 1937년에 그린 ‘연인들’에서 꽃에 파묻힌 연인들은 벨라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아래 마을과 동물들은 향수를 표현했다. 사랑과 향수는 그의 영원한 주제다. 이 모든 것을 지켜주기 위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있다. 1937년은 샤갈이 그토록 갈망하던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해다. 이 작품에 가득한 파랑, 빨강, 흰색은 프랑스 국기의 색이다. 한 작품에 이토록 많은 걸 녹여냈다.

이즈음에 벨라는 자신의 회고록 두 권을 썼다. 어린 시절 기억을 모아 ‘타오르는 불꽃’을, 샤갈과의 만남과 사랑을 모아 ‘첫 만남’을 집필했다. 그녀가 ‘타오르는 불꽃’을 쓰는 동안 샤갈은 ‘첫 만남’에 들어갈 삽화를 그렸다.

그녀 주위에|마르크 샤갈|1945|조르주 퐁피두센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유대인 탄압이 심해졌다. 샤갈은 1941년 뉴욕 현대미술관 초청으로 미국으로 간다. 그런데 1944년에 벨라가 급성 감염으로 미국에서 사망한다. 슬픔에 빠진 샤갈은 모든 그림을 벽을 향해 돌려놓고 붓을 놓았다. 그녀의 ‘예스(yes)’없이는 작품을 끝내거나 서명하지 않았다는 샤갈에게 벨라의 사망은 너무나 큰 절망이었다.

그는 딸 이다와 함께 벨라의 회고록 ‘타오르는 불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삽화를 그리며 버텼다. 그녀가 떠난 뒤 9개월, 샤갈은 다시 붓을 들어 ‘그녀 주위에’라는 그림을 그렸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깔이다”라고 말한 샤갈이 사랑을 잃어버리고 절망 속에서 그린 작품이다.

벨라와 만나고 결혼한 고향 비테프스크를 들고 있는 이다와 그 아래 팔레트를 손에 든 채 고개를 거꾸로 향하고 있는 샤갈, 오른쪽에는 젊은 벨라가 눈물을 닦고 있고 머리 위 신부는 유령처럼 떠돈다. 짙고 어두운 청색은 죽음에 의한 깊은 우울과 절망을, 새는 그녀를 구하지 못한 그의 자책, 촛불은 언젠가 다 타버릴 생명의 유한함을 표현했다.

그런데 샤갈은 왜 고개를 거꾸로 그렸을까. 주로 내면 응시로 풀이되지만, 내게는 벨라를 떠나보낸 슬픔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딸 이다의 친구 버지니아가 샤걀의 가사도우미로 들어간 뒤, 샤갈은 스물다섯 살 연하 버지니아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고 7년을 살았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벨라를 잊지 못하는 그를 결국 떠난다.

1952년, 샤갈은 발렌타인 브로드스키(애칭 바바)를 만나 다시 활력을 찾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며 98세까지 살았다. 샤갈을 사랑 충만한 예술가로 살게 해준 여인들, 어머니ㆍ벨라ㆍ이다ㆍ버지니아ㆍ바바가 없었더라면 샤갈의 그림은 다른 색깔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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