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철지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다. 언제부터인가 4월이 되면 벚꽃을 보며 즐기는 일이 일상이 됐다. 인천에도 벚꽃 명소가 여러 곳 있고, 자유공원에는 경관조명까지 있어 낮과 밤에 보는 느낌이 다르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며 즐거워하는 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한때는 벚꽃이 일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지금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전국을 대표하는 벚꽃길로 거론되는 서울 여의도 윤증로의 벚꽃은 창경궁이 창경원 시절에 일본 사람들이 심어놓은 것을 옮긴 데서 비롯했다. 군항제로 유명한 진해 역시 일제강점기에 심은 벚꽃에서 시작됐다. ‘일본인의 심성’으로 벚꽃을 심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벚꽃을 베어버리자는 건 전혀 아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일에서조차 민족 감정을 떠올리는 것은 또 다른 열등감의 표현이고, 그런 열등감에 휩싸일 만큼 우리가 나약하지도 않다. 그 원류가 어디이든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가졌던 의문은 벚꽃이 널리 퍼지기 전에 인천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꽃을 보며 꽃놀이를 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찾다보니 그 단서라 할 만한 기록이 있다. 1889년을 전후해 인천에 와서 활동한 아오야마 고헤이(靑山好惠)라는 일본 사람이 있다. 그는 인천에 있던 조선신보사(朝鮮新報社)에서 1892년에 펴낸 ‘인천사정(仁川事情)’이란 책의 월미도 항목에서 이렇게 썼다. “섬 안에 살구꽃이 많아 봄 4월 무렵 꽃이 필 때 인천항에서 그걸 보면 일대가 붉은 노을 같다. 하얀 집 여러 채가 그사이에 점철하니 마치 그림 같다고 한다”

1892년을 기준으로 보면 개항 이후이기에 인천에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던 건 틀림없다. 그래도 조선왕조의 힘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고,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청나라 세력을 압도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월미도의 살구꽃은 조선시대 인천 사람들이 심었거나, 어떤 이유로 월미도에는 살구꽃이 많이 자생했다고 볼 수 있다.

살구꽃 핀 월미도를 찍은 옛 사진까지 찾으면 더 분명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사진이 드문 시절이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상상하기엔 충분하다. 자유공원이든 어디든 월미도가 바라다 보이는 장소에 섰을 때 불그스름한 빛깔을 띤 살구나무의 행렬이 줄지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와 요즘의 우리를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문의 족보 정도가 거의 유일한 연결고리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며 즐겼던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시간은 다르지만 인천이란 같은 공간에 사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월미도에는 기왕이면 벚꽃보다 살구꽃을 심으면 좋겠다. 몇 년 뒤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본 것처럼 월미도에 활짝 핀 살구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인천 곳곳에 새로 심는 가로수와 조경용 꽃나무를 살구꽃으로 심어도 좋지 않을까?

어려운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통해서 과거와 대화하며 미래를 모색하는 인천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