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20.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아브궁전 벽화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아브궁전

목동들만 한가로운 아프라시아브 궁전터.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달린다. 옛날, 낙타 수십 수백 마리가 오가던 길, 바로 고대 실크로드다. 도로는 뜨거운 모래바람에 지쳐 털버덕대지만 주변 산과 들판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사마르칸트는 고대 실크로드의 핵심 도시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아프라시아브 언덕이 있다. 사마르칸트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는 멋진 왕궁이 있었다. 하지만 왕궁은 간 곳 없고, 언덕은 두 동강이 났다. 도로공사를 하려고 땅을 파던 중에 궁전 벽과 기둥이 발견된 것이다.

여기저기 파헤친 구덩이마다 따가운 풀이 무성하다. 목동들은 어제처럼 짐승들을 데리고 와서 그 풀을 먹이고 있다. 몇몇 목동들이 뙤약볕에 황무지를 둘러보는 나를 보고 신기한 듯 웃고 섰다. 그들에게 손 인사를 하며 7세기의 아프라시아브궁전으로 들어간다.

도로 건설로 두 동강이 난 아프라시아브 언덕.

커다란 궁전을 중심으로 귀족과 부호들의 저택이 자리 잡았고, 대상(隊商)들의 교역 장소인 바자르와 휴식처가 즐비하다.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복장을 한 왕은 각지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느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대상들은 순조로운 교역을 위해 진귀한 물건을 준비한다.

바자르에는 방금 도착한 신기한 물건들이 마법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고, 청순한 여인들의 가슴을 끝없이 달군다. 초승달 위로 반짝이는 샛별이 보일 때까지 음주가무가 끊이질 않고, 어둑한 뒷방에선 물건보다 더 귀중한 정보가 은밀하게 거래됐으리라. 여인은 비단과 금화에 밤새 사랑을 버리고, 낙타는 만취한 청년의 암울한 가슴을 밤새 보듬었으리라.

고구려인은 왜 사마르칸트까지 갔을까

아프라시아브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사신들(○부분). 조우관과 환두대도를 차고 있다.

아프라시아브 벽화는 1965년부터 3년간 소련의 중앙아시아 고고학자인 알리바움에 의해 발굴됐다. 이 벽화는 아랍 지배 이전에 완성된 것인데 8세기 초 아랍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 묻혀있었다고 한다. 높이 2미터쯤 돼 보이는 벽화가 어둑한 불빛에 희미하다. 그림은 많이 손상돼있지만 윤곽선은 뚜렷하다. 잠시 후, 눈이 전시실 불빛에 적응되자 벽화의 그림이 확연히 보인다.

벽화의 주제는 사마르칸트 왕이 각국에서 온 사절을 영접하는 장면과 사절단의 이동과 도착모습이다. 특히, 각국의 사절단을 그린 부분에는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남자 사절 두 명이 또렷이 보인다. 이 사신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이 벽화의 주인공은 와르흐만 국왕이다. 박물관장은 왕의 재위기간을 감안하면 이 벽화는 650년에서 670년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고구려인임을 의심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벽화에 그려진 사신이 부여냐, 고구려냐, 신라냐, 발해냐, 고려냐 등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왕의 재위시기를 확인하는 순간, 조우관을 쓴 사신은 고구려인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7세기는 고구려가 북방 초원길을 장악하고 있던 때여서 신라인이 초원길로 올 수 있는 상황이 못 된다. 통일신라는 왕의 재위기간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프라시아브 벽화 모사도.

벽화의 고구려인은 왜 머나먼 사마르칸트까지 갔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7세기 국제정세를 살펴보고 역사적 개연성을 확장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고구려는 중국과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했다. 중국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보다는 국가적 패배를 감수해야했다. 수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과 고구려와의 전쟁을 금지한 당 태종의 유언이 이를 입증한다. 대국적 자존심이 상한 중국은 고구려를 꺾기 위해 혈안이 되고, 이는 끊임없는 침략으로 이어진다.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였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는 자부심으로 승화돼 중국과는 별도의 문명권을 형성할 정도였다. 이러한 고구려가 중국을 효율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변국과 동맹이 필요했다. 수ㆍ당으로 이어지는 통일중국에 대항해 유연ㆍ돌궐ㆍ설연타 등과 동맹관계를 형성한 것도 격변하는 국제질서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은 고구려의 능동적이고 다중적인 외교 전략이었다. 또한, 이러한 외교 전략은 동북아시아의 질서유지에 기여했다.

7세기 후반, 고구려는 계속되는 당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역 제국과 연합으로 ‘원교근공’정책을 편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강국 사마르칸트가 최전성기일 때 사신을 보낸다. 사신들은 초원길을 이용했는데, 이는 고구려가 유목 제국들과 오랫동안 교섭해왔기에 가능했다.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사신은 이러한 7세기 후반의 치열해지고 있는 대당전쟁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외교 노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마르칸트 왕은 왜 고구려를 돕지 않았을까

아프라시아브 발굴 현장 전경.

하지만 원거리 외교활동을 벌인 사신들의 노력도 헛되이 고구려는 멸망했다. 사마르칸트 왕은 어째서 고구려를 돕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소그드인의 품성이 단적으로 알려준다. 즉, 고구려보다는 실크로드의 핵심 시장인 당의 발전이 그들에게 더 이익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중국을 뛰어 넘는 새로운 세계와의 연대는 중화문명과는 별도로 독자적 문명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됐다. 이는 글로벌정책에 입각한 개척정신의 발로이며 대단히 진취적인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고 국제사회 속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인식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고구려인의 천하관은 바로 이러한 진취적인 사고와 행동의 소산이었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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