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오 루시!(Oh Lucy!)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2018년 개봉

친구도, 가족도, 애인도 없는 중년여성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는 어느 날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의 황당한 부탁으로 영어학원에 다니게 된다. 학원에서 만난 영어강사 존(조쉬 하트넷)의 수업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자연스러운 미국식 영어를 해야 한다며 세츠코에게 금발의 가발을 씌우고 ‘루시’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준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미국식 인사라며 다짜고짜 포옹을 한다는 것. 얼떨결에 존의 품에 안긴 세츠코는 존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존에 대한 짝사랑으로 모처럼 열정이란 것이 살아났나 싶었는데, 이런! 갑자기 존이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그것도 세츠코에게 존을 소개해준 미카와 함께. 그런다고 포기할 세츠코, 아니 루시가 아니다. 곧장 휴가를 내고 존을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떠난다.

일본의 신예 감독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의 ‘오 루시!’는 루시라는 영어 이름을 쓰게 된 43세 중년여성 세츠코가 이전까지의 따분하고 외로운 일상을 벗어던지고 간만에 느껴본 짝사랑을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친구도 애인도 없는 독거중년의 외로운 일상을 벗어나 쨍한 햇빛이 쏟아지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꽤 신나는 여행담이 될 줄 알았다. 더구나 짝사랑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

그러나 ‘오 루시!’는 관객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비껴간다. 영어도 못하는 데다 미국 여행이 처음인 세츠코는 서툴러도 너무 서툴러 비웃음을 사기 일쑤다. 딸을 찾기 위해 동행한 언니 아야코(미나미 카호)는 내내 잔소리를 멈추지 않고, 겨우 만난 존은 알고 보니 무책임하고 무능한 남자일 뿐이다. 그나마 살가웠던 미카 역시 이모 알기를 옆집 강아지만도 못하게 본다. 존도, 언니도, 미카도, 모두 세츠코를 거부한다. 심지어 여행에서 돌아오니 오래 다녔던 회사에서마저 잘린다. 다 싫다는데도 구질구질하게 엉겨 붙는 늙다리. 대륙 횡단씩이나 하며 확인한 세츠코의 현실이다.

그 나이 되도록 벌어놓은 돈도 없고 결혼도 안 했고 함께 사는 가족도 없는 게 나랑 참 비슷해서, 세츠코의 황당하지만 신나는 여행담에 슬쩍 발을 담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츠코는 해도 해도 너무한,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독거중년이다. 그냥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구질구질하게 산다. 직장은 있지만 성취감과는 거리가 먼 단순사무직이라 따분하기 짝이 없다. 동료들과도 거의 교류 없이 지낸다. 혼자 사니 집이 휑해서 그런가, 집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져 있다. 유일한 핏줄인 언니는 남보다 못하고, 그나마 살갑게 굴던 조카는 이모 뒤통수나 친다.

수업방법이었을 뿐인 포옹 한 번에 마음을 빼앗겨 미국까지 날아가는 참으로 대책 없는 여자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싶었는데, 싫다고 내빼는 사람한테 무작정 들이대는 지질함은 뭔가. 내 취향에서 너무 벗어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영화를 보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자꾸 세츠코, 노랑머리 가발을 쓰고 어눌하게 “왓츠 업(What’s Up?)”을 발음하던 루시에게 마음이 쓰인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알 것만 같다.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도 손해를 보면서도 왜 그렇게 오지랖인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존에게 왜 그렇게 들이대는지도.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어느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로 세츠코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도 띄지 않는 존재. 표정 없는 회색도시의 일개 부품 같은 존재. 언제 없어져도 티 나지 않을 존재.

존재감이 없다고 어찌 존재가 없겠는가. 영어학원 동급생 타케시, 아니 톰(야쿠쇼 코지)이 그랬듯 어떤 존재든 서로 따뜻하게 안아줄 수는 있지 않은가. 그 온기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지만 존에게서 배운 포옹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번 안읍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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