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예사로운 발견은 아니다. 심환지가 누군가. 노론, 그것도 벽파의 우두머리다. 정조 재위 초기부터 모습을 드러낸 소위 시파와 벽파라는 정치색은 정조 시대의 정국 운영을 이끈 중요한 갈등 중의 하나였다.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사도세자가 모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지지했다. 이것이 ‘임오의리’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30주기를 전후해 조심스럽게 천명한 ‘임오의리’와 그의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이 시파였다. 반면에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정조의 개혁에 반기를 든 세력이었다.

심환지는 곧 반(反)정조세력의 중심에 서 있던 자였다. 게다가 정조가 사망하자 지체 없이 정조의 친위군이며 시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장용영을 없애는 한편 ‘신유사옥’을 일으켜 상대적으로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시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본격화하는 행보를 보여줬다. 정조와는 애초부터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심환지를 수신자로 한 정조의 은밀한 편지 수백 통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동안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정조암살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항상 심환지가 있었다. 악역을 필요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심환지와 그의 노론당은 정조의 의문의 죽음에 아주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노론 벽파의 은밀한 총공세를 묘사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심환지와 정순왕후의 음모론을 강조한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왕 독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에 방영된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이라는 사극은 보다 노골적이었다. 여기에서 악인 심환지의 역할은 음험한 눈빛과 함께 절정에 달한다.

‘팩션’이라는 형태로 제기돼온 이러한 정조암살설은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들이 공개되며 위기를 맞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창고에 방치됐던 같은 류의 편지가 알려지는 해프닝까지 겹치면서 암살 의혹을 뒤집는 발견이라고 떠들썩하다. 하지만 정조나 심환지나 모두 탁월한 정치가들이었다. 한 두 마디의 표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일은 아니다. 관련 연구자들의 정밀한 검토를 기다려봐야 할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정조의 편지가 1800년 6월 15일에 끝났다는 점이다. 보도에 따르면 정조가 이날의 편지에서 자신의 병과 처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에 앞서 정조는 5월 그믐날 아침의 경연 자리에서 자신의 정치 원칙을 분명히 밝히고 ‘임오의리’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한편 정개 개편의 가능성을 경고해 벽파의 무조건 항복을 강요한 바 있다. 소위 ‘오회연교(五晦筵敎)’다. 하지만 이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마지막 편지를 보낸 다음날인 6월 16일, 정조는 심환지를 불러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자신도 어쩔 수 없으니 ‘조만간 결국 결말이 날 것이다’라는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결말을 내지 못한 채 열 이틀이 지난 6월 28일 오후 창경궁 영춘헌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정조의 임종 시 그 옆에는 벽파의 지원자였던 정순왕후가 홀로 앉아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조의 뒤를 이어 심환지는 1802년에, 정순왕후는 1805년에 각각 사망했으니 권력이란 일장춘몽일 뿐인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시대가 막을 올렸다.

개혁과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정조의 시대는 왕권과 신권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즉위해야했던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과 화성은 왕권을 지키고 자신의 꿈에 다가서기 위한 중요한 안식처였다.

정조가 능행길에 들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욕은지와 어사대가 계양산 아랫녘에 전한다. 왕의 행렬을 재연한 ‘정조대왕 어가행렬’은 계양구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았다. 사실여부야 어찌됐건 이루지 못한 ‘정조대왕의 꿈’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다.

▲ 김현석
인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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