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 바르다, JR 감독|2018년 개봉

백발의 단발머리 끄트머리만 붉게 물들인 키 작은 할머니가 시골길을 걸어간다. 선글라스를 낀 훤칠한 청년이 할머니를 스쳐지나간다. 시골길에서, 버스정류장에서, 빵집에서, 클럽에서 서로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던 할머니와 청년이 마치 운명처럼 만나 함께 유랑을 떠난다.

유럽의 귀여운 할머니처럼 보이던 이는 다름 아닌 프랑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의 어머니’라 불린 거장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88세). 패셔너블한 청년은 전시장이라는 틀을 깬 거리의 사진작가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33세의 젊은 아티스트 JR.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영화 제목에도 등장하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과 JR이 공동 연출하고 출연한 다큐멘터리이자 로드무비다.

나이 차도 많이 나고 활동 영역도 다르지만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온 공통점이 서로를 알아보게 한 것일까. 두 사람은 영혼의 단짝을 찾은 듯 JR의 포토트럭을 타고 프랑스 구석구석 발길 닿는 대로 다닌다. 작은 시골마을, 폐광 이후 모두 떠나가는 쇠락한 탄광촌, 허허벌판의 농장 창고, 버려져 무너져가는 집들, 거친 파도가 이는 황량한 해변, 위험천만해 보이는 화학공장, 거대한 컨테이너가 시선을 압도하는 항만…. 바르다와 JR이 찾아간 곳은 화려함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가끔은 으스스해 보이기까지 하는, 과연 이런 곳에서 예술이 가능할까 싶은 공간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흥적으로 찾아간 공간에서 바르다와 JR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얼굴을 촬영하고 커다랗게 인화해 빈 벽에 붙이는 순간, 무표정이었던 그 공간은 총천연색 사연을 가진 고유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바르다와 JR의 작업에 참여한 이들은 물론이고 그저 신기하고 의아해 구경하던 마을사람들마저 함께 하는 축제가 된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펙터클한 화면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바르다와 JR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빙긋이 웃음이 난다.

88세 할머니와 33세 청년의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만드는 하모니가 여간 유쾌한 것이 아니다. 나이 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티격태격 서로 놀리다가도 꼭 필요한 순간에는 따뜻한 배려를 놓치지 않는 두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뭉클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두 사람이 ‘얼굴들’을 대하는 시선이다. 나처럼 평범하고 무신경한 사람이 보기에는 분명 피로하고 고된 일상에 묻힌, 그냥 지나쳐도 이상할 것 없는 무표정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바르다와 JR을 만나 그들이 살아낸 역사와 노동, 관계를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오직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빛나는 표정이 나온다.

거대한 크기의 인물 사진들은 집 위에, 농장 위에, 공장 담벼락에, 물탱크에, 기차 위에 전시된다. 이전까지는 아무 의미 없던 얼굴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은 채 존재를 드러낸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사랑하게 만든다. 그래, 누구에게나 빛나는 얼굴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염소에게도, 물고기에게도. 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란!

영화언어의 기존 체계를 과감히 부수고 새로운 시도로 영화의 역사를 다시 써온 노장 페미니스트 영화감독과 고상한 전시장을 벗어나 빈곤과 갈등이 있는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전시해온 청년 아티스트가 함께 만든 이 영화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보여준다. 예술은 그럴 듯한 모양새도 아니고 눈을 현혹시키는 화려함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람과 자연 사이의, 틈새를 열어주고 들어주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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