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인천을 흔히 ‘해불양수의 도시’라 한다. 바다가 강물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개항 이후부터 여러 지방 사람들이 모여들어 차별 없이 살아온 고장이라는 의미다. 한편에선 ‘인천 사람’ 또는 ‘인천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자주 들린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고등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심지어 중학교와 초등학교까지 따지는 경우도 경험한다. 인천의 주요 기관장을 공모할 때 인천 출신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해불양수’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이런 경향이 인천 출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인지, 인천을 잘 아는 사람이 인천을 위해 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당위에서 출발한 이야기인지,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이 시점에서 인천이란 도시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흔히 1883년 개항과 인천의 도시 정체성을 연결하는 인식이 강하지만, 인천이란 도시의 지정학적 조건과 그 안에서 삶을 일군 ‘인천 사람’ 앞에 놓인 조건은 개항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백제가 서울 강남의 하남 위례성에, 고려가 개성에,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천은 수도의 관문이었다. 사실 여부는 더 따져봐야 하지만 백제 사신의 출항지라는 능허대 전설에서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자연도(紫燕島, 현 영종도)에 이르러 남은 항해의 평안을 기원했을 장면에서도 관문인 인천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문이 열리면 원하는 것만 들어오는 게 아니어서, 고려 후기의 왜구나 조선 후기 이양선(異

樣船)도 인천 앞바다를 길목으로 해서 출몰하며 엄청난 재난을 불러왔다. 열린 도시로서 인천의 정체성은 단지 1883년 개항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그보다 1000년, 2000년 이전에

이미 배태돼온 것이다. 말 그대로 해불양수의 도시였다.

여기서 다시 인천의 정체성과 인천 사람을 생각해본다. 널리 알려졌듯이 일본 에도(江戶) 막부는 쇄국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큐슈지방의 나가사키는 열어 놓아 최소한의 교류와 선진문물을 수용했다. 네덜란드를 가리키는 화란(和蘭)에서 따온 ‘난학(蘭學)’은 그 증거가 된다.

인천이 일본 에도시대 나가사키와 같은 열린 고장으로서 낯선 문물과 사람을 편견과 차별 없는 해불양수 정신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게 할 수는 없을까? 그러려면 출신이 어디든

인천에 터 잡고 살면 인천 사람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한다. 300만을 자랑하는 인구에 비해 대학도 적고, 대학과 지역의 연계도 아직은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분야별로 많은 외부 전문가가 인천에 관심을 갖게 유도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해불양수의 도시로서 마땅히 가야하는 길이다.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굳게 닫힌 남북 사이의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자 여기저기서 남북교류를 외친다. 하지만 남과 북이든, 남과 남이든, 남과 외국이든 교류의 본질은 같다. 다른 입장, 다른 문화를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이는 지속적일 수 없다. 전쟁과 대립의 갈등을 안고 있는 인천이 여러 줄기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되듯 여러 문화와 사람이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명실상부한 해불양수의 도시로 성장하길 기원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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