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부평지킴이 - 진흥종합상가 내 ‘영광상회’

▲ 영광상회의 김호섭 할아버지
장사는 역시 흥정이 오가야 제 맛이다. 볼 살에 와 닿은 겨울바람이 어느 때보다 매섭게 몰아치는 오후 부평종합시장 안 진흥종합상가 한 가게 안에서 단돈 몇 푼이라도 더 깎으려는 한 아주머니와 제값을 받으려는 주인장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에이 3000원만 더 빼줘요”
“거참 이거 내가 1만 5000원에 가져와 그리 받는 건데 3000원 빼면 나는 어떡하우?”
“그러니까 빼달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2000원”
“글쎄 어렵다니까. 이만한 가격에 다른 데 가서 알아볼 수 있음 알려줘 봐봐”
“그야 믿고 왔으니까 알지요. 그래도…”

결국 그 실랑이는 모두의 안성맞춤을 위한, 말 그대로 실랑이에 불과했다. 제값을 치러야만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알기에 오가는 실랑이는 어쩌면 그 제값을 확인하기 위한 서로의 소통인지도 모른다.

얼굴에 웃음 가득 싣고 실랑이를 벌였던 그 아주머니에게 여긴 자주 오냐고, 왜 자주 들르게 되냐고 물었다. 그 질문이 얼토당토않은 듯 그 아주머니는 “잘 해주니까 오지 박하게 대하면 오겠소? 우리 큰 아들이 올해 마흔이 넘었는데 30년 넘게 올 수 있는 건 그만한 게 있으니까 오는 법 아니겠수?” 오히려 구박이다.

아주머니와 실랑이를 벌였던 주인장은 올해 일흔셋 되는 부평종합시장 내 터줏대감 진흥종합상가의 영광상회 김호섭(73) 할아버지다. 40년 가까이 장사를 해왔으니 터줏대감 일만도 하다.

김 할아버지는 “한번 팔아먹으려고 장사하믄 오래 못 가게 댜(돼)있어. 그거이 금새 들통나불게 돼 있거든. 장사는 물건바라보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 상대하는 거여. 믿음 깨져불믄(면) 그걸로 끝장인 게. 그거이 사람 사는 시상벱이여. 그 품질에 맞는 그 가격. 어른들의 맘이 그것이제”라고 실랑이 와중에 전했다.

전라남도 영광이 고향인 그는 1968년 부평에 오기까지 당시 그 동네에서 마을 청년회장을 하며 나름대로 이름을 알린 준재였다. 예부터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던 것처럼 서울에 가면 그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고 몸 하나 믿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가 그래도 친척 연고 있는 부평에 정착한다.

“서울로 와갔고 다시 부평으로 내려왔제. 외가 친척이 병방리(계양구 병방동)산다 해서 그짝 동네로 갔다가 걱(거기)서 정미소 총무일 맡기 길래 한 몇 달 혔나… 그라고 있는데 졑에(곁에)있던 사람이 ‘미군기지(부평)에 일자리 있는디’ 하길래 이력서 써서 그곳으로 갔지. 근데 그 일도 나 한티 안 맞드만. 그래갖고 장삿일 시작하게 됐당께”

막상 장사를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떤 품목을 정할지도 난감했지만, 물건을 어디서 떼올 것인가도 어려운 문제였다. 김 할아버지가 이를 해결했던 길은 ‘목포역’이었다. 김 할아버지는 한 달에 20여일을 목포역과 서울역을 오가며 물건을 가져왔다.

“한 1년 동안 그렇게 한 것 같어. 지금도 건어물 취급하고 있지만 내 장삿일 시작이 바로 건어물이었당께. 모릉께 서울역과 목포역 오감시롱 물건 해다 팔고 그랬제. 그렇게 1년 하고 났더니 졑에(곁에) 있는 사람이 겔차 줘서(가르쳐 줘서) 그 때부터 여그 을지로 중부시장서 물건 해오고 있어. 그때 기차 값이 좀 비싸. 말도 말어 고생 무지하게 했지. 그래도 다 살길은 있는 벱이라서 승객 10명 모아오면 난 그냥 얻어 타고 다녔거든. 역서(여기서) 목포 갈 때는 서울역서 열 명 모으고, 목포서 서울역 올 때는 거그서 모아서 댕겠제”

그렇게 호남선을 오가며 자신만의 터를 닦아가며 장삿일을 시작했다. 주로 지금의 부평시장로터리 일대에서 자신은 어깨에 짊어지고, 김 할아버지의 부인인 이옥녀(72) 할머니는 머리에 이고 그렇게 둘이서 어렵사리 장삿일을 꾸려가기 시작한 것. 그러다가 70년대 노점단속과 더불어 깡시장(현 부평깡시장) 일대에 시장이 마련되자 당시 마련한 종자돈으로 현 ‘영광상회’ 인근에 4평짜리 조그만 가게를 얻었다.

“지금도 깡시장이라고 허제만 그 때도 걱서 야채와 과일 도매시장이 열렸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도매시장서 벌어지는 일을 ‘깡부른다’ ‘깡부른다’혀서 깡시장이라고 헌 것이여. 시장로터리에서 노점으로 장사 할 적에 우덜 같은 장사꾼들이 그 때도 데모하고 그랬당께. 단속 심하게 허믄 달라붙어 싸우기도 허고…그래서 지금 부평시장 터가 나온 것이제. 나도 그래서 고 때 여그로 오게 됐어”

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우리 아그들이 6남맨디 그 아그덜을 다 역서 키웠당께. 그래도 가게 얻기 전 저짝(저쪽) 미나리깡 하꼬방(판자집, 현재 부평5동 일대)에서 살 때 보담은 낫드라고. 4평짜리 가게 안에다 다다미 얹어가꼬 욱에서(위에서) 아그들 재우고 밑에서는 우리 마누라랑 살고 그렸어. 하도 추웅께 널빤지에다 전기코일 돌돌 말아서 그 우게다가(위에다가) 종이 발라서 그걸로 전기장판 쓰던 시절이었응께 고생 원 없이 했제”

김 할아버지는 부평종합시장 안에서 제법 유명인사다. 여러 미디어에 소개된 탓도 있지만 워낙 성실하게 일하기로 정평이 나있어서다. 지금도 새벽 5시가 조금 넘으면 가게 문을 연다. 그리고 가게 문 닫는 저녁 8시까지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광상회에는 김 할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4명이 일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 내외와 큰며느리, 그리고 막내아들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김 할아버지는 대를 이어 영광상회를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래도 내가 부평바닥에서 장사하나로는 정직하고, 신용 잃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아들 녀석이 그 일을 잇게 함으로서 보여주고 싶어서다. 우덜 같은 장사꾼덜이 다덜 그러잖어. 내 자석만큼은 요일 말고 다른 일 허게 해야 한다고. 그란디 나는 틀려. 일흔 넘도록 지금도 하고 있는 이 일이 나 한티는 자랑스러운 일이라 이거여. 우리 막둥이가 나만큼은 아직 아니겠지만 이 일이 그 아이헌티도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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