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부평지킴이] 산곡동 서울연탄 이산진 할아버지

▲ 서울연탄 이산진(77) 할아버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추운 날에는 어김없이 생각나는 것이 따끈따끈한 아랫목이다.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몸을 뉘이고 있으면 제아무리 동장군이 활개를 쳐도 따사롭고 평온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예년 기온을 되찾으며 영하로 내려갔던 수은주도 영상으로 올라 겨울햇살이 유난히 따사롭게 내리쬐던 11월 21일, 산곡동 ‘서울연탄’ 이산진(77·사진) 할아버지와 배달용 리어카(인력거)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할아버지가 쓴 모자와 얼굴사이로 비추는 햇살 탓인지 40년 넘게 이 동네 아랫목을 따끈따끈하게 덥혀온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할아버지 이 동네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다기에 할아버지 얘기를 들으러 왔어요” 했더니, 할아버지는 대뜸 “그런 것 안 해”라고 잘라버린다. 그리곤 한참동안 말없이 주변만 정리한다.

그래도 이것저것 코치코치 묻자 할아버지는 귀찮은 듯 “이것 봐봐(리어카를 가리키며) 일이 없으니 고물 주워 내다 팔고 또 담아 온 게야. 일이나 있으면 신나서 대꾸라도 할 텐데 일도 없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가보드라고” 하고선 돌아서며, “전에는 세무서에서 허구 헌 날 영업 감찰 나와 귀찮게 하더니 요새는 장사가 안 되니 그놈들이 안 오고 무슨 기자들만 오고 난리네 그려”라고 혼잣말을 한다.

‘세무서에서 영업 감찰이 나왔어요? 그게 뭐에요?’라고 묻자, 그 때서야 할아버지는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말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할아버지가 말한 세무서 영업 감찰은 연탄이 잘나가니 혹시 판매된 연탄수를 속여 세금을 덜 낼까봐 이를 감찰했다는 얘기다. 할아버지에 의하면 연탄 한 장마다 세금을 매겨 이를 징수했다.

우여곡절에 말문을 연 할아버지는 “지금도 자식들이 막 뭐라고 그려. 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지. 지난번에도 한 신문이 취재해 가서 자식들이 그걸 알고는 ‘기자들 오면 상대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게야. 그래서 케이비에스 무슨 인간시댄가 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도 안했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얘기는 더 이어졌다. “사실 내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어. 이 동네 연탄보일러 몇 가구 안 되는데 그 사람들 나 없으면 안 되거든. 내가 일일이 배달해줘야 해. 동네 보면 알겠지만 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길이 많아. 그래서 저기 저 수레(연탄 50장용 수레와 100장용 수레)에 싣고 가서 배달해. 이제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가 천지인데 연탄배달이 돈 되는 일이겠어. 그렇지만 같이 살아야하는 법이니까 나도 이일 하고 있는 게야”

이산진 할아버지가 연탄과 함께한 세월은 꼬박 45년이다. 80년대 만하더라도 산곡동(현 산곡1동과 2동) 일대에는 연탄가게가 35군데나 있었다. “그러니 그때도 돈은 별로 못 벌었던 게지. 그렇게 많았으니 어디 돈 벌었겠어?” 하고 할아버지는 웃었다. 

집집마다 연탄보일러가 있던 시절 이 할아버지의 연탄은 잘 나갔다. 서울연탄으로 바뀐 것은 인천에 연탄공장이 없어지면서부터다. 부평역 인근에 강원연탄공장, 주안역에 제일연탄공장 등 인천에는 당시 8개 연탄공장이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강원연탄공장에서 가져오기도 했고 제일연탄공장에서도 가져왔는데, 강원연탄이 사라지고 제일연탄에서 가져다 쓰면서 산곡동 ‘제일연탄’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가져오게 됐으니 ‘서울연탄’으로 바뀐 것이다. 가게 간판은 이 할아버지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서울’이라는 글자 아래로 ‘제일’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45년 전. 이 할아버지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연탄 한 장 가격은 9원이었다. 7원에 가져와 9원에 판매했는데, 당시 쌀 한가마니가 3000원 정도 할 때라 연탄 100장을 팔아야 쌀 한두 되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 서울연탄 이산진 할아버지의 리어카.
지금은 이 할아버지 혼자서 연탄을 나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할머니와 같이 했다. 지금 가게에서 산곡동 입구 삼거리(백마장삼거리)를 지나 연탄공장이 있는 부평역까지 인력거를 끌고 가서 실어 날랐다.

세월이 흘러 연탄보일러가 점차 사라지면서 연탄공장도 없어졌다. 이 할아버지는 “이문동에서 배달해주는데 한 번 시키면 2000장을 시켜야해. 한 1200장정도 시키면 되는데 그렇게는 안 받아주거든. 그래서 하는 수없이 한 트럭(2000장)을 시키는 수밖에 없어”라고 전했다.

취재가 끝날 무렵 동네 한 조그만 회사에서 연탄 100장 주문이 들어왔다. 반갑게 맞을만한데도 할아버지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연탄 한 장에 지금은 400원 내왼데, 하루에 많이 팔아야 200~300장 팔거든. 그 걸로는 살아갈 순 없지. 그래도 나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래서 이걸 붙잡고 있는 게야”라고 말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연탄보일러 세대들도 얼마안가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 이 동네 일대가 재개발 구역으로 예정되면서 ‘서울연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자신을 보잘것없다며 낮추어 말하는 이산진 할아버지. 산곡동은 그가 있어 반세기 넘게 훈훈한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어느 때보다 그리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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