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부평지킴이] 십정동 ‘현 헤어뉴스’ 미용실

▲ 십정동 ‘현 헤어뉴스’의 김선숙 원장.
“요즘 서인영인가 하는 가수하고 탤런트 장미희의 헤어스타일이 반응이 좋아요. 제법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그 스타일은 30년 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이에요”

올해로 꼬박 30년이다. ‘현 헤어뉴스’의 김선숙(56) 원장은 오늘도 손에 가위와 빗을 들고 십정동 사람들의 머리를 곱게 다듬고 있다. 일하다가도 손님들이 왕왕 드나들며 인사를 건네면 사람 이름 불러가며 집안 안부를 되묻는 답인사를 건넨다.

동암역 남광장 ‘마담언니’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동네에서 30년 동안 미용실을 하다 보니 최근에 이사 온 사람이 아니고서는 김 원장과 ‘현 헤어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원장으로 통하지만, 예전엔 마담으로 통했다. 요즘도 할머니들은 김 원장을 여전히 마담으로 부른다.

한번은 동인천에 볼일 있어 갔더니 저 멀리서 ‘김 마담~’ 하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속으로 ‘대낮에 웬 마담을 저리 큰 소리로 부르나’ 하고 계속 걷고 있는데 앞서 걷던 사람이 ‘저 분이 아주머닐 부르는 것 같은데요’ 하길래 돌아봤더니, 미용실 단골 할머니가 반가운 나머지 그렇게 ‘마담’을 외쳤던 것이다.

어릴 때 엄마손 잡고 머리 다듬으러왔던 아이들은 어느덧 애 엄마나 애 아빠가 돼 자신들의 아이를 데려오고 있고, 김 원장이 어렸을 때 미용실을 찾던 사람들은 이제 할머니 고객이 돼서 여전히 찾는다.

그들에게 동네 사랑방 같은 ‘현 헤어뉴스’ 미용실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 머리방’에서 출발한다. 미장(美粧)일을 배우고 미용사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해도 김 원장은 전혀 미용실을 생각에 두지 않았다. 그런 그가 미용사가 된 데는 선한마음과 안타까움이 섞인 사연이 있다.

스물 둘이라는 당시로 봐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그는 결혼했고 이듬해 아이를 낳았다. 헌데 아이가 자라 이발을 해주려고 가는 미용실 마다 매번 울더란다. 이에 김 원장은 ‘내가 배워서 아이들과 남편의 머리는 내가 단장해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석바위에 있던 인천미용학원에 등록했다.

김 원장은 “학원에 등록할 때 원장이 ‘일주일만 배우면 된다’ 하길래 잘 됐다 싶었는데, 등록할 때 옆에 있던 40대 한 아주머니가 같이 배우자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자격증 안 따고 그냥 배우기만 할 거에요’ 했더니, 자신은 공부해도 어려우니 도와 달라 하더라고요. 그러자고 했더니 나중에 자기가 내 시험 등록비용까지 계산해 버렸더라고요”

그렇게 20대 색시와 40대 아주머니는 같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김 원장만 합격했다. 합격하긴 했지만 원래 미용사에 관심이 없던 터라 자격증은 집에서 뒹굴 뿐이었다.

점심 거르기 일쑤였던 시절

그런데 그 자격증이 몇 년 못가 김 원장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었는지 김 원장의 선한 마음을 알아본 한 몹쓸 이웃이 그에게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다. 김 원장은 “그때 애기 아빠 월급이 8만원  정도 하던 때인데 200만원 넘는 돈을 날려버렸어요.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라고 회상했다. 

이때부터 그는 미용사의 길을 걸었다. 막상 가게를 내려하니 엄두가 안 났던 그는 용기를 내 전부터 언니 동생하며 알고 지내던 미용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 동생이 반갑게도 그를 맞아주자 김 원장은 미용실 일을 거들며 틈나는 대로 실전을 연습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81년, 김 원장은 자신의 미용실을 차리고 ‘현 머리방’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김 원장은 “그 동생에게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겨 가게 문을 닫고 저와 같이 2년을 같이 일했어요. 그때가 참 좋았어요. 지금은 미국에 나가있지만 보고 싶은 동생이에요”라며 “그 동생이 나가고 나중에 서구에서 우리 미용실을 이용하던 한 아주머니가 자기 딸을 거둬달라고 찾아왔어요. 알고 보니 소아마비로 절룩거릴 뿐 일도 잘하고, 잘 배우고 마음 씀씀이도 고와서 7년을 같이 있었는데, 그 아이도 많이 보고 싶네요” 하고 말했다. 

김 원장이 당시 같이 일했던 동생과 아이를 그리워하는 데는 미용일의 어려움을 알고 있어서다. 손님이 있으면 거의 점심을 못 먹고 일하던 때라 위장병 걸리기 일쑤인데다, 당시에는 전문미용학원도 많지 않아서 소아마비였던 미용사는 ‘현 머리방’으로 오기 전까지 있던 미용실 원장의 아이 키우는 일, 빨래하는 일까지 도맡으며 미용일을 배웠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원장은 같이 자신을 도와 준 그들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미용실을 내고 틈틈이 갈고 닦은 실력으로 그는 1987년 전국미용대회에 나가 금상을 수상했다. 이후 국제단체로부터도 상을 받을 만큼 그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현재 김 원장은 대한미용사협회중앙회 강사로 활동 중이다. 미용사가 꿈인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하루 종일 걷는 것도 힘든 일인데 오죽하겠어요. 때문에 요즘은 이직도 많아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끈기를 갖고 인내할 줄 알면서 열정을 갖고 임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기 마련이에요. 우리 후배들이 어딜 가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 끝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남길 바라요”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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