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육군 인천조병창, 부평 지하호
제물포구락부·내동성당·대불호텔 등

인천투데이=박규호 기자│인천은 한국 근현대 산업·문화 유산의 보고이다. 제물포항이 1883년 개항된 후 각국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이 빠르게 들어섰다.

제물포항(1883년)은 부산항(1876년)과 원산항(1881년)보다 개항이 늦었지만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각 나라 공동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국제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공동 조계지가 설치 후 해외 문물이 인천으로 들어와 국내 각지로 퍼졌다. 인천에 건립된 여러 시설들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달 1일부터 3일까지, 8일부터 10일까지는 각각 개천절과 한글날 대체공휴일을 포함한 연휴이다. 연휴를 맞아 걸으며 구경할 수 있는 역사적 장소 찾아본다.

1948년 촬영한 인천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 B구역 내 조병창 병원 건물(사진제공 독자)
1948년 촬영한 인천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 B구역 내 조병창 병원 건물(사진제공 독자)

인천에 조성된 군수공업지대

청일전쟁(1894년)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는 데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가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항만과 철도가 있고 조선 제일의 도시 경성(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에 군수공장을 포함한 중공업단지를 건설하고, 일본 육군 조병창을 지었다. 

부평 평야지대에 전기와 기계 제조업체와 금속강판 제조회사·군용트럭 제조사가 들어섰다. 용현동과 학익동 일대는 제국제마(마 원료를 생산해 마면직물을 제조)·히타치(특수기계산업) 제작소·경성화학 등이 채워졌다.

지금은 당시 군수공업지대를 떠올릴 수 있는 형체는 부평에 설최된 일본육군 인천조병창 공장 터와 일부 건물만이 존재한다.

부평 '캠프마켓'의 모습.(사진제공 인천시)

캠프 마켓, 일본육군 인천조병창(부평구 산곡3동 449)

일본 육군 인천조병창은 1941년 5월 일본이 군수품 보급을 위해 만들었다. 매달 소총 4000정과 총점 2만정, 소총 탄원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000정, 차량 200량 등을 생산했던 일분군의 대표적인 병기창이다.

당시 1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강제로 조병창에 동원됐다. 때문에 인천조병창 건물은 일제 침략전쟁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해방 이후, 일본군이 떠난 조병창과 그 인근에 미군이 주둔했다. 지금은 주변 부대들이 철수하고 조병창의 핵심구역에 있던 ‘캠프 마켓’만 남아 시민에게 개방됐다.

인천시는 캠프마켓 반환과 일부구역 개방에 맞춰 시민의 관심을 높이고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시민 참여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시 문화관광해설사 예약시스템에 접속해 신청하면 개방 구역 내의 잔존 건물과 시설물 용도와 역할 등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부평 지하호의 모습(사진제공 인천시)

부평 지하호(부평구 산곡1·3동 일대)

2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해가던 1945년 초 일본 육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안전하게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조병창 공장시설을 지하에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인천조병창도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가좌동 사이에 있는 함봉산의 지하로 소총과 실탄 생산 시설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운다.

함봉산 자락 모두 네게 구역으로 나눠 지하 구조물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공사가 완료되기 전 조선이 해방이 되면서 실제 지하호에서 무기가 생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평 지하호는 방치되거나 일부는 새우젓 저장고 등으로 활용됐다. 그러던 중 2015년 부평문화원에 의해 역사적 의미가 알려졌다. 지금까지 모두 지하호 24개를 확인했다.

부평문화원은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 부평지하호를 직접 걸으며 체험해 보는 C-6 지하호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부평문화원 홈페이지에서 사전예약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에 전시한 중구지역 전체(제물포)를 축소한 모형.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에 전시한 중구지역 전체(제물포)를 축소한 모형.

인천 중구 개항장

제물포 개항 이후 각 국의 조계지가 들어서며 인천은 국제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을 거치며 한반도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제물포와 경성을 잇는 도로와 철도(1899년)를 부설하고, 이들과 연계할 항만을 확장·수축(1906년)했다.

이어 일본은 식량과 공업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등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했으며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했다.

개항장 일대를 살펴보는 일은 인천이 국제도시로 성장하는 이면에 조선의 주권 침탈과  한민족의 시련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물포구락부 야경(최준근 사진작가 작품, 제공 인천시)
제물포구락부 야경(최준근 사진작가 작품, 제공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제물포구락부

제물포구락부는 제물포클럽을 일본식 발음으로 음차한 말이다.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 사교모임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1891년 세운 건물이다. 원래 위치는 중구 관동 1가 8-2번지였지만 1901년 6월 22일 현재 위치로 옮겼다.

2층 양옥 구조 벽돌 건물로 지붕은 양철이다. 내부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식당 등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다.

1913년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 소속 정방각으로 불렸다. 1934년 일본부인회, 1945년 해방 직후에 미군사병구락부, 1952년부터는 시의회, 교육청, 박물관이 함께 사용하는 등 여러 차례 용도가 변경됐다.

2007년 6월 인천시가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제물포구락부의 모습을 복원해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제물포구락부 스토리텔링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반까지 운영된다.

1891년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인천 내동교회의 모습.(사진제공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1891년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인천 내동교회의 모습.(사진제공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성공회 내동성당(중구 개항로 45번길 21-32)

1890년 9월 찰스 존 코프 주교와 의사였던 바 랜디스 선교사 등이 최초의 공식 조선 선교단으로 인천항에 들어왔다.

성공회 내동성당은 존 쿠프 주교가 송학동 일대에 토지를 매입해 성 미카엘 성당을 설립하고 현재 내동 성당이 있는 위치엔 성 루가 병원을 지으면서 세워졌다. 

내동성당은 1902년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이용됐고, 1904년부터 1956년까지 성공회신학원으로 운영됐다. 현재는 성공회성당으로 쓰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일부 파괴됐던 것을 수리해 1955년까지 황해중학교로 이용하기도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성 미카엘 성당이 완파되면서 성공회는 새 성당을 지어야 했고 송학동 성 미카엘 성당 토지를 팔아 성 루가 병원 위치에 1956년 6월 내동성당을 새로 열었다.

대불호텔 전시관.
대불호텔 전시관.

대불호텔(중구 신포로 23번길 101)

대불호텔은 한국 최초의 호텔이다. 1888년 일본인 호리에 의해 세워졌다. 경인선이 개통하기 전 인천에 도착한 외국인이 대개 하루 이상 인천에 머물러야 했기에 인천에 최초로 호텔이 생겼다.

최근 연구를 보면, 일본인 호리가 1883년 말에서 1884년 초 2층 일본식 목조건물에서 호텔영업을 시작했고, 1888년에 벽돌조 3층 건물을 새로 세워 이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영업이 어려워졌고, 이후 중국 음식점으로 운영하다 1978년 철거됐다. 현재는 그 자리에 대불호텔 전시관이 생겨 당시 호텔의 건축양식과 호텔 서비스, 대불호텔 역사를 알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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