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진다. 항도의 끝 월미도를 물들이던 벚꽃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4월 25일 무렵 만개했다는데, 때 이른 낙화는 더위마저 일찍 불러오려나 보다. 봄날의 햇볕이 뜨겁다. 상춘(賞春)의 아쉬움을 달랠 사이도 없이 벚꽃이 떠난 자리를 이번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밀고 들어온다. 벌써부터 희미하게 다가오는 향내만큼이나 벚꽃의 아름다움 역시 급하게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해마다 4월이면 갑작스럽게 피었다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벚꽃을 보면서 차마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볼 수 없었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일본이라면 사소한 것에도 흥분을 하는 한국사람들이 왜 ‘사쿠라’에 대해서만은 이토록 관대한 것일까. 누구의 말처럼 ‘꽃은 죄가 없다’는 생각에 모두들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벚꽃이 곧 일본이라는 관념은 아직 건재하다. 그럼에도 4월이면 전국을 축제 분위기로 들뜨게 만드는 벚꽃의 생명력은 어딘가 어색함이 묻어있다.

사실 해방 직후 벚꽃의 운명이 그리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본인이 가져다 심은 ‘식민지 모국의 꽃’이 해방된 ‘식민지 백성’의 손 아래서 안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목재나 약재 등을 얻기 위해 키웠을 뿐 꽃구경을 위해 벚나무를 심은 적은 없었다.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하고 그곳을 벚나무 숲으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하나미(벚꽃 구경)’는 일본이 이식해 놓은 놀이였을 뿐이다. 일본의 몰락과 함께 많은 벚나무들이 베어지며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벚꽃은 한국인들에 의해 다시 부활됐다. 한때 창경원의 ‘밤 벚꽃놀이’에 2만여명의 군중이 한번에 몰려들 만큼 벚꽃 놀이는 점차 한국의 봄을 대표하는 행사로 자리를 잡아간다. 벚꽃이 부활될 수 있었던 것은 혈통의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를 거치며 조선에 이식된 벚나무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고 있는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라는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 일본 우에노(上野) 공원의 벚나무를 조사할 때 학술적으로 명명됐다는 소메이요시노는 우리나라에서는 왕벚나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나무다.

왕벚나무는 이미 1908년 이후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제주도 한라산에 자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리고 1932년 교토제국대학의 고이즈미 겐이치(小泉源一) 교수가 소메이요시노의 원산지가 제주도 한라산이며 제주도를 방문한 선원들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학설을 내놨다.

일본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소메이요시노의 기원이 한국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 한국 학자들에 의해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일본이 아니라 제주도라는 사실이 재확인되면서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왕벚나무들은 기원의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일종의 면죄부를 얻은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공원과 거리에는 다시 벚나무가 심어졌다. 정통성을 인정받은 이상 과거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전국 어디를 가나 벚꽃 놀이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아직도 가로를 조성할 때 벚나무는 인기 있는 수종 중의 하나다.

식민잔재 청산이라는 해묵은 과제와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혈통의 문제를 해결했다고는 해도 왜 그때 벚나무를 선택했을까.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국가가 그려놓은 길을 따라 걷고 공권이 심어놓은 꽃길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길들여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 후면 부평의 경관도 한차례 큰 변화를 겪게 될 것 같다. 주민들이 변화의 기원과 선택의 이유를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꽃잎이 사라진 동암(銅岩)의 언덕길을 걸으며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물음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왜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여전히 익숙해 있을까.’
▲ 김현석
인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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