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기왓장을 뚫고 나올 때, 억울한 감정과 분노가 가슴 속에서 솟구쳤다. 수십대의 소방차가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붓는 소화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4~5시간 만에 숭례문 누각은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적심’이라는 덧서까래가 소화 작업을 무력화시킨 원인으로 분석됐다. 이미 지붕과 천정 사이 깊숙이 자리 잡은 ‘적심’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는 외부의 물길이 흘러들지 못했고, 바깥에서는 소란을 떨었지만 숭례문의 누각은 연기로, 참혹한 재로 불타버리고 만 것이다.

이 비극적 상황에서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방화의 동기다. 땅값 보상에 대한 불만을 역사유물을 향해 표출한 70대 노인의 폭력행위, 그리고 “문화재는 복구하면 된다”는 그의 뻔뻔함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정신 나간 개인의 광기에 의한 방화 사건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시민들의 정신적 피해가 너무 크다. 사적 불만을 공적 공격으로 처리한 개인의 정신세계 속에 새겨진 사회적 의미가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이번 방화사건에서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지고 정부의 책임부서와 정치권은 ‘적심’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자신들에게 번질 것을 극도로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해야 할 것은 단지 유형 자산의 피해와 직무상의 책임소재정도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잿더미와 범인의 뚜렷한 범죄 상황은 어쨌든 결과가 있고, 처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축적물의 파괴와 붕괴된 잿더미를 뒤집어쓴 공동체의 자존과 정신적 피해는 도저히 보상 받을 수 없는 민족적 상처인 것이다.

어쩌면 정신적, 역사적 자산을 오로지 상품가치로 환원하려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서적 환경이야말로 방화의 본질적 발화점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새로운 권력자들은 영어몰입교육을 부르짖으며, 수천년을 거쳐 우리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온 모국어에 대한 멸시적 태도로 공동체의 언어, 정신공간을 헤집다가 시민사회의 비난을 사고 일부 후퇴했다.

그러나 그들이 던져놓은 헤픈 농담은 인수위의 아침인사 ‘굿모닝’으로 끝나지 않고 사교육 시장에 단박에 불을 지피고 말았으니, 참으로 서민들의 가슴을 태우는 값비싼 농담이 되고 말았다.

언어가 기능적 역할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과 문화재는 복구하면 된다는 방화범이 함께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과도한 비약일 수도 있지만, 공동체의 역사와 정신세계를 부정하는 모국어 학대 정신의 주도자와 숭례문을 상품으로 저자거리에 내던진 주체가 동일인이라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몰락하는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들, 재벌유통자본에 의해 붕괴되는 재래시장의 소상인들, 그리고 태안에 뿌려진 기름덩이로 인해 대한민국 민초들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고이고 있다.
어째서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자들은 여유자적이고 농담질인데, 민초들은 기름때를 벗겨야 하고 성금을 걷고 숭례문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민초들은 절망에 길들여지고, 권력자들은 오만으로 시민들의 무력감을 조롱하고, 지식인을 자처하는 인사들은 국가권력이라는 품안에서 ‘오린지’ 타령으로 모국어를 능욕함이 이지경인데, 과연 시민들의 가슴 깊은 곳 ‘적심’에는 이미 이런 오만방자한 세력에 대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08년 정월에 불타오른 숭례문은, 대한민국을 향해 자신을 불살라 민족공동체의 갈 길을 밝혀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시민의 분노와 역사의 분신을 두려워해야할 새로운 권력자들은 오늘도 영어타령이다.
▲ 인태연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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