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산2동 12통

뒤로는 위용을 자랑하듯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고층아파트들이 숲을 이뤄 마치 두 팔로 감싸안듯 주택가를 품고 있다. 앞으로는 아무 것도 없이 탁 트인 전망에 길을 건너면 그리 크지 않지만 넉넉한 천이 흐른다. 주택가에서 천까지 가는 길은 잘 정돈된 가로공원이 걸음을 가볍게 한다.

평범한 다세대주택들로 이뤄져 있지만 마치 도심 한가운데 호젓하게 지어진 전원주택 촌 같기만 한 이곳은 갈산2동 12통이다. 보통 100가구 정도로 구성되는 다른 통에 비해 훨씬 단촐한 33가구로 이뤄진 12통은 도시에서 보기 드문 호젓한 풍경을 만든다. 대부분이 아파트인 갈산2동의 동네 특성을 봐도 이곳은 참 특별한 곳이다. 주택가 앞을 가로지르는 굴포천은 여유 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도시생활에 잠시나마 큰 숨을 들이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자연을 닮은 넉넉한 인심


사람은 자연을 닮는다고 했던가. 이렇듯 여유로운 환경은 12통 이웃들의 넉넉한 인심을 만들었다. 워낙 세대수가 적다 보니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웃 간에 친밀감이 높다. 반상회 한번이면 동네에 누가 아픈지, 어느 집에 어떤 경조사가 있는지 12통 전체에 쫘 하게 퍼진다.

그래서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보호 수급대상으로 선정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웃들의 눈치로 어려운 이웃을 발견하면 동사무소에서 쌀을 타다 나누어주기도 하고 통장이나 반장이 수시로 들러 보살피곤 한다.

이것은 12통 통장 최순락(45)씨를 비롯해 동네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부지런한 이웃들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올해 갈산2동 바르게살기위원회 신임 위원장으로 선출된 황장순 위원장도 12통 주민. 올 한해 독거노인 9세대와 결연을 맺고 밑반찬을 만들어드리기로 한 갈산2동 바르게살기위원회는 지난 설에 고기며 떡이며 음식을 준비해 노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명절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렇게 나서서 동네 일을 돌보는 사람들 외에도 12통 주민 모두가 동네 일이라면 적극적이다. 고단했던 일주일의 피로를 풀기에도 모자랄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주민들은 빗자루 하나씩 손에 들고 거리로 나온다. 안 나오면 벌칙이 있거나 청소를 한다고 특별히 혜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12통 주민들은 ‘내 집 앞은 내 손으로 치운다’는 마음으로 아침 청소에 참여하고 있다. 길 건너 굴포천 변 가로공원 역시 12통 주민들의 훌륭한 휴식공간이기에 스스로 청소하고 있다.


“동네를 알아가는 즐거움에 힘든 줄도 몰라요”


이렇듯 아기자기하고 사람냄새 풀풀 나는 동네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12통 통장 최순락씨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씨는 남편을 도와 건설장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관공서의 공사를 주로 맡다 보니 시청이며 구청을 오갈 일이 많았단다. 6년 전 회사 근처에서 이곳 갈산2동 12통으로 이사를 온 최씨는 문득 시청이며 구청은 남들보다 훤히 알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고, 옆에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도 관심이 많아졌다. 최씨의 이런 관심은 2년 전 집 담벼락에 붙어 있던 통장 모집공고를 발견하게 했고 바로 이력서를 써서 동사무소를 찾았다.

그렇게 스스로 찾아가서 통장을 맡게 된 뒤 집안 일에 회사 일에 동네 일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지만 최 통장은 최근 몇 년 동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자랑한다.

최 통장 역시 바깥일을 하고 있고 대부분의 이웃들도 생업에 바빠 낮에는 집을 비울 때가 많기 때문에, 퇴근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동네 한바퀴를 돌며 주민들을 만나는 것으로 통장 생활을 시작한다. 반상회 역시 저녁 느즈막히 최 통장 집에서 열어 주민들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게 열어두었다. 다른 통에서는 하기 힘들다는 반상회가 유독 12통에서 잘 되는 것은 주민들의 실정을 최대한 고려한 최 통장의 남다른 배려가 있기 때문.

한 달에 한번 열리는 반상회는 구나 동사무소 일을 주민들에게 통보하는 여느 반상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저마다 먹을 것 한아름씩 싸와서 차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면 거의 매번 밤 12시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마치 옛날 빨래터 분위기다.

반상회를 통해 12통 주민들은 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고 어려운 이웃이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의 힘을 모으고 있다. 굴포천 변 가로등이 예전보다 더 많이 설치돼 안전한 밤길을 보장하게 된 것도, 한 빌라에 살고 있는 독거노인에게 매달 쌀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도 반상회에서 주민들이 나눈 이야기꽃의 결과다.

최 통장이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2001년 시작된 굴포천 차집관거 공사로 인한 주민 피해다. 이미 공사는 마친 상태지만 12통 11세대가 외벽 균열 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공사업체나 시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본보 2003년 1월 22일자) 작년 일부 주민들이 낸 소송에서 법원은 “공사로 인한 피해가 전혀 없다”며 공사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아직도 몇몇 집은 비만 오면 전기가 안 들어오고 침수 때문에 아예 방 하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집도 있어요. 하지만 법원에서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판결을 했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있습니까?”

최 통장은 설 연휴가 끝나는 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할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다면서도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주민 참여가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든다


12통 주민들은 집 앞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굴포천이 깨끗한 생태하천으로 거듭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반가워하고 있다. 굴포천만 깨끗해진다면 넉넉한 인심에 아기자기한 동네 분위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달 동사무소에서 하는 굴포천 청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이 바로 12통 주민들이고 작년 굴포천 주민대책위원회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들도 12통 주민들이다. 최 통장은 굴포천 주민대책위원회 총무일까지 맡아보며 열성을 보이고 있다.

주민들의 참여야말로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12통 주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름다운 동네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웃들의 인심이 살아 있는 12통. 주민들의 참여로 굴포천도 깨끗하게 만들어 더욱 살기 좋은 동네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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